몽양 여운형의 선택- 선택의 기준은 어려움이 아니라 당위성이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라고 하면 3.1 운동과 상해의 임시정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의열단 등을 떠올리시겠지요? 나라를 빼앗긴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던 여러 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정부로부터 임시정부 대표로서 초대받아 일본으로 가서 일본 내각을 총사퇴시킨 사람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오늘은 너무나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론 그 활동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몽양 여운형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서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고 있는 손기정 선수가 보이시나요?
동아일보의 기자였던 이길용 등 3명은 회사에 알리지 않고 몰래 내보낸 일장기를 지운 내보냅니다. 이 사실은 금세 발각되어 동아일보는 10개월 동안 신문을 낼 수 없게 됩니다. 동아일보는 사장과 기자 등 13명을 해고하며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려고 한다'라며 '반성'을 하였고 10달 후 다시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앞서 조선중앙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내보냈습니다. 일장기가 선명한 사진을 본 당시 조선동아일보 사장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장기를 지워서 기사를 내보냅니다. 하지만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일부러 지운 것인지 인쇄가 잘못된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 그대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사진이 문제가 되면서 조선중앙일보도 강제로 신문을 낼 수 없게 됩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가 계속해서 신문을 내려면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실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중앙일보와 여운형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폐간되었습니다.
일본 내각을 총사퇴시킨 여운형
때는 3.1 운동 직후입니다. 3.1 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여운형은 외무위원장으로 외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때 일본이 여운형을 도쿄로 초대합니다. 3.1 운동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큰 비난을 받습니다. 신한청년당과 3.1 운동, 임시정부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큰 역할을 한 여운형을 일본의 편으로 회유할 수 있다면 독립운동을 분열시키고 일본의 유화정책을 대내외에 홍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으며, 일본의 회유에 넘어갈 수 있다는 이유로 임시정부 내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여운형은 도쿄로 가기로 합니다.
첫 일정은 코가 장관과의 만남입니다. 코가 장관은 일본과 조선의 합병이 회사를 합치는 것과 같이 모두에게 이익이라며 여운형을 회유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조선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으며, 일본의 조선 점령이 동양평화를 해치고 나아가 동서양의 균형을 깨뜨려 세계평화를 위협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정부 요인들과 면담하였으며 그때마다 조선의 독립을 당당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데이코쿠 호텔에서의 기자 회견이 열렸을 때에도 많은 기자들 앞에서 역시 조선 독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도쿄 제국대학 요시다 사쿠조오교수가 초청한 모임에는 100여 명의 일본인과 수백 명의 도쿄대 학생이 참여하였습니다. 여운형의 연설에 공감한 오스기 사까에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 참석자 대부분이 합창을 하였습니다.
이렇듯 여운형은 일본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하지만 독립운동가로서 당당히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설파하고 여론을 모은 일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일입니다. 결국 여운형으로 인해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되면서 하라 내각이 총사퇴하고 의회도 해산되었습니다.
여운형이 일본으로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위험할 수도 있고 변절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했지요? 여운형이 평소 한 말을 살펴볼까요?
나는 혼자요, 저놈들은 방대한 무력을 틀어쥔
대적(大賊: 큰 도둑)이니 힘으로는 대비가 안 되지.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저놈들에게 빚진 것도
죄진 것도 없는 정당한 사람이요
저 놈들은 조선에 대죄를 지은 강도들이다.
나는 정의요 저놈들은 부정의(不正義)이니
내가 저놈들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지.
세상에 정의와 진리만큼 강한 무기는 없는 거야.
밤이 지새면 새날이 밝는다는 것은 엄연한 진리가 아닌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후 여운형은 강대국들의 관계를 잘 조정하고 이용하여 분단되지 않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과 소련의 대표를 만나기도 하고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운형의 노력은 자신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여러 정치단체로부터 비판을 받았습니다. 여운형을 경계한 정치세력들의 테러는 계속되었으며,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혜화동 자신의 집 부근에서 살해당합니다. 그에게 가해진 11번째 테러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절망은 마음의 자살이라고 하였네.
밤이 지새면 새날이 밝는다는 거야.
엄연한 진리가 아닌가.
너도나도 작은 힘이나마 합쳐나가면 새날은 앞당겨질 거네.
여운형은 평생 조국의 독립,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통일 조국의 건설 등 오로지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한국사회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여운형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여 민족의 지도자이자 민족의 스승이었던 그의 삶을 나라와 국민이 함께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선택을 할 때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삶 속에서 항상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민족의 지도자였던 여운형은 항상 민족을 위한 선택을 하였으며, 이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길을 조금도 주저 없이 걸어갔습니다.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 선생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때 그 기준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어려운가, 어렵지 않은가'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내 선택은 '그 일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아닌가?'라는 당위성이다.
어떤 선택의 길에서 망설일 때 여운형 선생님의 용기와 선택의 기준을 생각해보세요!
선택과 그 실천의 길이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