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일도 억울한데 신문고 울리니 오히려 벌을 받았어!
신문고는 '궁궐 밖에 북을 설치하여 백성들이 억울함을 직접 왕에게 알릴 수 있는 제도'였으며, '글을 모르는 백성도 사용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로 질문!
조선시대의 이야기다.
한양에 살고 있던 노비 A 씨.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평생을 일만 하던 노비 A 씨는 주인이 이유 없이 자신을 때리는 것에 대해 힘들지만 참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어린 아들까지도 심심풀이로 괴롭히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신문고를 울렸다.
충청도에 살고 있던 평민 B 씨. 그는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의 수령이 너무 많은 세금을 내게 하자 문제를 제기했다가 오히려 곤장을 맞았다. B 씨는 옆 마을의 세금과 비교도 해보고, 국가에서 정해준 세금보다 훨씬 많이 낸다는 것을 알고 서울에 올라가 신문고를 울렸다.
강원도에서 한 마을을 다스리고 있는 수령 C 씨. 그는 강원도 관찰사가 뇌물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자신의 근무성적을 최하점으로 주는 것에 분개해 신문고를 두드렸다.
위의 세 가지 경우 중 신문고를 울려도 되는 경우와 울려서는 안 되는 경우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
사연을 읽어보면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신문고를 울릴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지 않다.
정답은...
이 세 명 모두 신문고를 울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문고는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는 일, 백성이 관리를 고발하는 일, 낮은 계습의 관리가 윗사람을 고발하는 일로는 신문고를 두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 세 가지 경우로 신문고를 울린다면 오히려 큰 벌을 받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로 신문고를 울릴 수 있었을까?
애초에 신문고를 울리는 절차가 복잡했다.
'나! 억울합니다!'하고 신문고 있는 곳으로 가서 북을 둥둥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방에서는 먼저 자신의 마을 수령에게 호소를 하고, 해결이 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 그다음은 사헌부에 억울함을 호소하도록 했다. 그래도 그 처리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제야 신문고를 칠 수 있도록 했다. 각 단계별로 전 단계의 관리 확인서가 있어야지만 다음 단계의 관리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
과연 마을 수령과 관찰사들이 그 확인서를 써주었을까? 아니면 압력과 회유를 통해 신문고를 치지 못하도록 했을까?
드라마 같은 것에 보면 신문고가 나오는 장면은 대개 이렇다.
억울한 사정이 있는 백성이 아무도 없이 '북'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북을 치는 것이다. 그럼 관리가 나와 어떤 억울한 일이 있느냐를 묻고, 임금이 그 사정을 듣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그림이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신문고가 설치되었던 대부분의 시기에 신문고는 궁궐 안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백성들이 궁궐 안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
그리고 신문고는 한양에만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
결국 신문고는 서울에 있는 양반들이 주로 사용했다. 그럼 '글을 모르는 억울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신문고의 정의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왕의 행차를 막으며 꽹과리를 친 이유는?
신문고는 일반 백성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그럼 정말 '억울한 일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그 제도가 상언과 격쟁이었다. 상언은 왕이 궁궐 바깥으로 나왔을 때 글을 올려서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격쟁은 왕의 근처에서 시끄럽게 꽹과리나 징을 울려 시선을 끌어 말로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두 가지 모두 왕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려야 하니 주로 왕이 선대 임금들의 능을 방문하기 위해 궁궐 바깥으로 나왔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1791년 1월 18일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행차를 보고자 하는 백성들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나와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나무 그늘 아래 편하게 앉아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이 있고, 엿을 파는 사람도 있다. 그 와중에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한 사람이 행차를 가로막는다. 이렇게 격쟁을 한 사람은 흑산도에 사는 김이수라는 사람이었다. 김이수는 흑산도 사람들에게 부과된 잘못된 세금을 없애달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김이수는 나주 관아와 전라도 감영에 세금의 문제점을 호소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임금의 행차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3개월간의 현장조사 끝에 그 세금은 철폐되었다.
정조가 처리한 상언과 격쟁은 4427건이며, 궁궐 밖을 나온 행행 중에 처리한 건은 3355건이다. 한 번의 행차에 평균 51건을 처리하였으며, 100건을 넘게 처리한 경우도 있다. 생각해보면 기막힌 일이다. 왕의 행차가 백성들이 중간에 뛰어들어 100번도 넘게 멈춘 적도 있다는 것이다. 정조가 능행을 많이 한 이유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 의도가 강했다는 이야기가 이런 이유로 나오는 것이다. 정조의 민원처리 건 수를 기네스북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 임금의 행차를 방해했으므로, 일단 곤장부터 맞고 격쟁은 시작된다.(물론 그 곤장이라는 것은 형식적이었다.)
나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중국 자금성 앞 천안문 광장에는 화표가 2개 세워져 있다. 그리고 자금성으로 들어가면 역시 2개의 화표가 있다.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500년도 더 된 문화유산이다. 화표는 우리나라의 홍살문, 일본의 도리이처럼 이 곳이 신성한 곳임을 상징하며,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화표가 패방으로 발전한다.)
화표 위에는 '후'라는 신성스러운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이 '후'가 하는 역할이 재미있다.
안쪽에 있는 '후'는 황제의 집무 공간 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황제란 궁궐에만 있어서는 백성들의 삶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주 밖으로 나오셔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살펴보십시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깥에 있는 '후'는 궁궐 밖에 나간 황제를 바라보고 있으며, ' 너무 바깥으로만 다니시면 나라의 일을 처리하는데 소홀할 수 있습니다. 얼른 궁궐에 들어오셔서 나라의 일을 돌보십시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래저래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분명하다.
인터넷 신문고와 국민청원, 조직 내의 민주적 문화
오늘날은 민원 만능시대다.
민주주의 사회 즉 국민이 주인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하고 싶은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으며, 그 어떤 불이익도 겪지 않는다. 전화나 클릭으로 쉽고 편리하게 내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내 신분을 밝히지 않더라고 그 내용이 처리가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민주적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네!"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직도 권위주의와 수직적 문화가 깊게 깔려 있다. 그래서 왕조 사회의 문화인 신문고나 격쟁을 통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불합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한 절차와 방법,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와 지금이 다르듯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사회가 되어있기를 바라며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