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한참 봉사활동에 빠져있을 때였다.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다녔고, 봉사활동을 하는 영역도 넓어졌다. 다양한 사람들과 활동을 다니다 보니 서로가 하고 있는 봉사활동을 공유하게 되고 새로운 활동을 계속하게 됐다. 주말뿐 아니라 평일 저녁에 한 활동도 하게 되었다.
영유아원, 재활원,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는 교회도 갔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빵을 굽는 곳도 갔고, 헌혈도 하러 다녔다. 1달을 기준으로 매주 정해진 봉사 지를 가면서 반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도 큰 기쁨이었다.
그중 함께 활동을 하던 분의 안내로 백혈병에 걸린 한 아이와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은 내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때문에 하루 종일 무료함과도 싸워야 한다. 친구도 별로 없고, 가족들도 많이 지쳐있고. 꾸준히 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고 병원에서 주선하는 아이와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때 당시는 인터넷 환경이 지금처럼 원활하지 않아 이 활동을 위해 병원에서 아이에게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했다고 들었다.
11살의 공주님이었다. 친구도 없고 학교 가서 친구랑 노는 것이 소망이었던 아이였다.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자 구구단을 쉽게 외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잠시 답장이 늦으면 잊었느냐는 귀여운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생활 도중에 친구 집에 가서 메일을 보내곤 하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연락을 주고받진 못했다. 그래도 띄엄띄엄 소식을 주고받았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잠시 내려갔다가 친구를 만나기 전 pc방에 들러 메일에 접속했었다. 메일에 접속하는 순간 오랜만에 들어와 있는 아이의 메일. 반가운 마음에 얼른 열었다. 어머님이 보낸 메일이었다. 그 아이가 아기 천사가 되어 우리의 곁을 떠났다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울고, 토하고... 며칠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냈다.
우연히 모임 사무실에 있어서 집어 든 책, <두근두근 내 인생>.
한참을 읽어 내려가도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다. 며칠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책장이 그리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주인공인 아름이의 상황이 이해되며 300쪽을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은 <조로증>에 걸린 아름이의 이야기이다. 19살에 부모가 된 엄마와 아빠, 조로증에 걸려 나이는 열일곱 살이지만 신체는 80살인 아이, 치매 아버지와 살고 있는 60대의 장 씨 할아버지, 모든 것이 쉽지 않지만 중간중간 피식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작가는 관조적인 자세로 삶을 보여줬다. 그래서 좋았다. 아름이의 태도는 그 어떤 어른보다 어른스러웠다.
아름이는 다른 친구들이 가장 부러울 때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떨어진 친구들이란다. 세상의 상처를 다 받은 사람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부럽다고 했다. 자신은 거절당하고 실망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해서. 실패해보고 싶단다. 실망하고 울어보고 싶단다.
후원을 위한 tv 출연에서 아름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없니?"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럼."
"사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뭐를?"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 같거던요."
"......."
"그래서 아직 기도를 못했어요. 이해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뒤 나는 겸연쩍은 듯 말을 보냈다.
"하느님은 감기도 안 걸리실 텐데, 그죠?"
아름이의 이런 어른스러움에 난 아름이보다 아름이의 아빠나 엄마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나 역시 두 아이의 아빠라서. 그런데, 방송 후 이서하라는 17살의 소녀에게서 편지를 받고 난 다음 난 아름이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동갑내기이며, 역시 큰 병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를 공감하며 영혼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아이. 아름이는 사랑에 빠졌고, 난 20년 전 백혈 병동에서 나의 메일을 기다리던 그 아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서하라는 소녀가 사실은 30대의 아저씨라니..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다룬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아름이를 이용한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을 잊고 순간적으로 욕을 할 뻔했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한참이 지나 난 정신을 차렸지만 아름이는 영혼도 육체도 시들어갔고, 난 다시 아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작가가 글을 잘 쓴 것인지, 내가 너무 심하게 감정이입을 한 것인지 글의 마지막이 너무 힘들었다.
잠도 잘 올 것 같지 않은 밤이다.
"선생님, 저는 00 엄마입니다.
진작 연락을 드려야 했었는데 조금 늦어서....
00은 지난 7월 3일 치료도중 합병증으로
아기천사가 되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00에게 보내주신 사랑 제가 대신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