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시기였어'라고 추억하지 마라.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by 랄라라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제목도 특이하고, 김연수 작가의 책을 몇 권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쳐 보았다.

첫 번째 <벚꽃 새해>는 시작부터 유쾌했다. 성진이 헤어진 여자 친구 정연에게서 선물 했던 시계를 다시 돌려달라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진상이라고 표현할 만한 일이다. 그까짓 거 돌려주면 아무 이야기도 아니겠지만, 깔끔하지 못하게 그럴 수가 없다. 얼마 전 그 시계를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빛나는 시기에 서로를 사랑했던 연인이 시간이 지나 자신의 초라해진 모습을 발견하고 힘들어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새롭게 시작하려면 과거를 잊거나 과거를 현재와 미래를 잇는 계기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둘 다 쉬운 것은 아니다. 시계를 찾기 위해 함께 간 시계방에서 정연은 자신이 더 초라해짐을 느낀다. 빛나던 그 시기를 찾고 싶은데 오히려 헛된 시간을 보냈다는 자괴감을 가진다. 그런 정연에게 시계를 수리하는 할아버지는 '아무리 구석까지 찾아왔어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다'라고 말한다. 헤어진 연인보다 더 많은 인생의 시간을 보낸 할아버지의 기억은 아직 그들에게 화려하게 빛날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있으며, 지금의 초라함 또한 사실은 그 과정이라고 이야기를 건넨다.

두 번째 장 <깊은 밤, 기린의 말>을 읽는데 인물과 배경이 달라졌다. 장편소설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 번째 장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을 때 인물과 배경이 달라지자 느낌이 이상했다. 찬찬히 책의 제일 뒤쪽 표지를 보니 이 책은 단편소설 11권을 묶은 책이었다. 이제껏 김연수 작가의 장편소설만 읽은 터라 당연히 장편소설일 거라 착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책을 읽는데 오히려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4월의 미, 칠월의 솔>에서 '팸 이모'는 남편 폴이 다시 태어나도 만나고 싶은 사랑받는 사람이었으나 '한국에 돌아온 차정신'은 영화감독과 불륜의 동거를 한 사람이었다. 동거는 '혹시 이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질까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자다가 깨고 또 자다가 깨는 행복한 시간'이었으나 감독의 아내와 아이를 만난 후 '얼른 잊고 싶어 외국까지 멀리 떠나게 되는 시간'이었으며, 한참이 지난 후 그의 아들을 만나 알게 된 '아무 두려움 없이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던 반짝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기예보의 기법>에서 미경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그는 우주비행사가 꿈이었지만 기상예보관이 된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자 상실감에 젖어있던 그녀는 현장실습은 온 세진이라는 잘 생긴 남자에게 빠져든다. 세진은 얼마 전 헤어진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하고 무심코 그녀가 던진 첫눈이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에 그날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녀가 곧 다른 남자와 이혼한 뒤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 떠나기 전 눈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미경은 세진을 위해 전국의 모든 예보관들이 비가 온다고 예보할 때 미경은 눈이 온다고 예보를 하고 세상 모든 종류의 욕설과 조롱을 듣는다. 끊임없이 사랑을 찾던 미경은 어머니의 생신에서 과거가 항상 가족들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연인, 엄마, 이모, 친구, 남편, 제자 등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 '옆'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빛나는 시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언제이고, 어떻게 누렸으며, 어떻게 다가와서 어떻게 멀어졌는가는 다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11편의 이야기는 모두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빛나는 않은 시기는 없다. 그때는 참 빛났었지라고 어떤 시기를 추억하지 마라. 한 번도 멀어져 본 적 없으니'

바이올린의 영혼을, 그는 한 시간 가까이, 매만졌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자, 마치 이물을 뒤집어쓰고 흐느끼는 듯 먹먹하던 A현의 소리가 침대를 박차고 나와 그가 보는 앞에서 서서 큰 소리로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면 그는 안도했다. 그리고 완전히 만족했다. 마치 그 순간을 위해서. 자신은 바이올린 제작자가 된 것처럼.
<인구가 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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