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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라 Jan 31. 2021

우리나라에도 있는 피라미드?

한성백제를 찾아서

삼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 이름의 의미는?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다. 이 분들의 이름 뜻은 무엇일까?

광개토대왕릉비에 보면 광개토대왕이라 부르는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여기서 국강상은 임금의 능이 있는 장소이다.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땅의 경계를 넓게 하였다는 뜻이다. 평안은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뜻이며, 호태왕은 고구려에서 임금을 부르는 말이라고 추정한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광개토대왕은 나라의 영역을 크게 넓힌 왕이라는 뜻이다.

장수왕이라는 이름은 말 그래도 長壽, 오래 산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가 97세까지 살았으며, 왕으로 있던 기간은 79년이다.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는 83세까지 살았으며 왕으로 있던 기간이 52년이니 장수왕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은 진흥왕이다.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힘을 크게 키워 신라를 진흥시킨 왕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침체된 상태에서 크게 발전시키는’이라는 뜻의 진흥은 한자어로 振興이다. 하지만, 진흥왕의 진흥은 한자어로 眞興으로 불교식 시호이다. 뜻을 둘 다 같게 해석해도 상관없겠다.

그렇다면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인 근초고왕의 이름이 가지는 뜻은 무엇일까? 

뭔가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머리에 딱! 하고 떠오르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초고왕의 이름 뜻은 백제 5대 왕인 초고왕의 업적에  가까운(近) 왕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초고왕은 말갈과 신라의 여러 성을 쳐서 함락시켜 백제의 영토를 넓힌 왕이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구려 군사를 대동강에서 무찌르고 평양성을 점령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며, 바다 건너 중국의 요서지방과 산둥지방, 일본의 규슈지방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그는 불안했던 왕권을 강화시키고, 역사서 편찬과 해상무역을 진흥 등 많은 업적을 이루어  백제를 고대국가로 발달시켰다. 그 결과 백제가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었다.

     

백제를 공부하려면 어디를 가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부여와 공주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역사를 보면 한성 도읍기(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 도읍기(475~538), 사비 도읍기(538~660)로 한성(지금의 서울)을 도읍지로 하고 있던 시기가 500년이 넘어 웅진과 사비를 합친 것보다 2배는 더 많다.

그래서 한 때 수학여행으로 백제문화 탐구라는 주제로 여행을 했을 때 ‘서울--> 공주--> 부여’로 다닌 적도 있었다.

오늘은 한성에 도읍을 두었던 한성백제 시기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하루의 현장학습으로 왕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한성백제박물관, 석촌동고분군을 둘러보는 코스가 적당하다. 

     




많이 설명한다고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하루종일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며 교사가 계속 설명을 한다는 것은 박물관이나 문화유적, 문화유산을 싫어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많이 설명한다고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흔히 박물관에 가면 많은 사설 체험학습 단체들이 모집한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하고 있다. 주로 박물관 로비에서 많은 설명을 한다. 그리고 지루해하지 않기 위해 퀴즈도 내고 체험활동도 한다. 

그렇지만, 말이다. 우리가 박물관이나 유적지에 가는 것은 그 문화유산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이다. 활동지든 체험활동이든 그 활동은 그 문화유산을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사설 체험학습 단체들을 보면 바뀌어 있다. 지식의 전달이 먼저이다 보니 문화유산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도록 다양한 생각들을 이끌어내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문화유산을 직접 바라보는 시간이 너무나 짧다. 더구나 흥미 위주로만 수업을 하다 보니 유물을 직접 관찰하는 활동은 아주 짧고 로비에 앉아 활동지의 사진을 통해 관찰을 하게 한다. 가끔 옆에서 슬쩍 들어보면 최신 연구 경향은 반영되어 있지 않고, 일부 학자들의 의견만을 이야기한다. 역사나 문화유산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양한 해석들을 상상력을 통해 체험해보는 것이기도 한데 말이다.

하지만, 박물관에 데리고 와서 이러한 단체들에 아이를 맡기는 학부모들의 만족도는 아주 높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여기 와서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는 강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주로 박물관에 데리고 와서 아이를 맡기고 두 시간 정도의 교육시간 동안 학부모들끼리는 박물관 내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부모가 “뭐 배웠어?”라고 물어보면 아이는 설명을 들었던 사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나누었던 생각이 아닌 주입된 암기 지식. 이 지식들은 휘발성이 강해 금방 날아가버린다. (오히려 그게 더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이 박물관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으니 이 곳은 다시 평생 오지 않아도 될 곳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생각한다. ‘역시 박물관은 지루한 곳이야’

박물관에서 진정한 의미의 즐거운 활동을 한 아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너무 재밌네, 다 못 봤으니 다음번에 이곳에 다시 오고 싶어!’

물론 모든 교육단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잘하는 곳도 많겠지!!!

     

한성백제 탐구

풍납토성, 몽촌토성, 한성백제박물관, 석촌동고분군 답사 계획을 세우며 아이들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계획서를 세웠다.

특히 초등학교 아이들은 인물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 스토리텔링 하기도 좋고, 이해도 빠르다.

그래서 ‘근초고왕 집중탐구’라는 주제로 아이들이 모둠을 이루어 UCC를 제작하도록 했다. 교사의 역할은 중간중간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 잠시 도와주는 것뿐이다. 하루 동안 만나는 모든 문화유산을 근초고왕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통합하여 이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래쪽에 제시한 대로 5개의 미션을 수행하도록 하였고, 그 미션은 모두 다르게 제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미션을 수행할 때는 미리 콘티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미션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전 지식으로 a4 두장 정도의 짧은 설명 자료를 주어 읽게 하였고, 각 장소별로 비치되어 있는 리플릿을 적극 활용하도록 안내하였다.

     

수행미션
  가) 근초고왕은 누구인가? - 백제본기온조전, 가계도
  나) 근초고왕의 도시건설 – 입지조건, 몽촌토성과 풍납토성(해자), 도시기반시설 중 하수도 시설 토관
  다) 근초고왕의 외교 – 칠지도, 고리칼, 금동신발 등 위세품, 양나라의 토기 / 무역
  라) 근초고왕의 백성 –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인의 얼굴( 양직공도 제작시기는 530년대 후반 양무제, 즉 백제로는 성왕 때로 추정됨) / 음식과 부뚜막, 집
  마) 근초고왕의 무덤(석촌동 3호분) – 누구의 무덤인가 – 피라미드, 명 13 릉, 장군총의 비교                 -  작아지는 삼국의 무덤과 더 커지는 중국의 무덤


2. 수행미션 제작방법 (4개 제작)  미션별로 동영상으로 제작하되 모두 다른 형태로 제작 
   – 설명하기
   - 인터뷰하기(왕 또는 관리, 성 건설책임자, 사신 등)
   - 역할극 하기 
   - tv 광고(공익광고 또는 담화문- 왕이나 관리)

     

 

이렇게만 제시하면 스스로 탐구하고, 모둠별로 협력하는 멋진 교육이 이루어진다.

결과물도 함께 제시하고 싶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실을 수가 없음이 아쉽다.

이 주제로 교사 연수를 진행한 적도 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간 적도 여러 번이다.

석촌동고분군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형태의 무덤으로 한성백제 시기 지배자들의 무덤이다. 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교사나 학생들이 놀라움 또는 새로움으로 바로 보는 곳이다. 가장 큰 제3호분은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제시한 미션 중  '작아지는 삼국의 무덤과 더 커지는 중국의 무덤'은 미리 보는 관점을 설명했다. 삼국의 무덤은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문화가 발전하면서 더 작아졌다. 무덤의 규모를 보여줌으로써 왕의 권위를 나타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영향으로 순장이 없어지는 것 또한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무덤은 왕이나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더욱더 커지고 화려해졌다.  삼국의 이러한 경향은 조선까지 이어져서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의 힘듦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왕릉을 최소화하도록 유시(유언)를 내렸다. 그런 반면 중국의 황제들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의 무덤을 최대한 화려하게 만들고 치장하였다. 중국의 백성들은 왕릉 건설을 위해 많은 세금을 내야 했고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가 존속 기간이 차이가 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대하는 사회 지배층의 생각의 차이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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