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명절 증후군

by 크리스티나

오늘따라 새파란 하늘은 더욱 청명하고 하얗게 뭉실뭉실 떠 있는 조각구름들은 한 폭의 그림 같아 내 눈이 즐겁다. 그 곁으로 살랑살랑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내 모든 신경을 청량하게 해 주니 이미 가을은 성큼 다가와 그 살갗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어릴 적 가을이 오면 제일 먼저 추석을 기다리곤 했었다. 그 지겹던 학교를 정당하게 쉴 수 있었고 온 가족이 모여 도란도란 송편을 만들며 웃고 떠들고, 친척들로부터 받았던 소소한 용돈은 명곡의 피날레가 주는 감동처럼 추석의 말미에 내 가슴을 설레게 했었다.


머리가 커가면서 어릴 적 그 즐거웠던 명절의 추억은 이제 귀찮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친척들과의 소홀해진 관계도 한 몫했겠지만 직장 생활 중 유일하게 긴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기도 하기에 명절을 쇠는 것보다는 가족들과 어디 가까운데라도 여행하는 게 더 즐거워졌다.


지금은 나의 인생이 한 단계 더 성장하여 내겐 '며느리'라는 라벨이 하나 추가되었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서 누군가는 절대 이해 못할, 그 누군가는 우리 남편이겠지만, Pre-명절 증후군이라는 계절병을 매번 앓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적 관습으로 볼 때, 명절의 제사는 남편의 조상에게만 지낸다. 명절 아침에 지내는 짧은 제사는 순식간에 지나가는 하나의 의식이긴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음식상은 사실 여간 고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하나는, 막상 그 고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그 조상들과는 일면식이 없거나 직접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며느리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은 명절 증후군이라는 주로 여성들만 겪는 일종의 문화 증후군을 탄생시켰다. 대게 명절 전. 후에 생기는 이 증후군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생기는 것으로 가끔 남편의 얼굴만 봐도 울화가 치밀고 신경질이 나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엔 이 명절 증후군이 명절을 쇠고 난 뒤가 아닌 그 전에만 극명하게 나타난다. 일명 'Pre-명절 증후군'이다.


내가 우리 남편을 사랑하는 만큼 그의 가족 또한 사랑한다는 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가끔 시부모님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사할 때가 많다. 그런데 명절만 되면 이상하게 나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편과 우리 집안의 명절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집안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대체로 명절엔 가족끼리 단합하고 쉰다는 의미가 제일 큰데 시댁은 그렇지가 않다.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에 전통적인 방식의 차례와 성묘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로 인해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물론, 그 준비는 여자들의 몫이다. 즉, 시아버지와 남편은 도와만 줄뿐 주도적으로 그 준비에 앞장서지는 않는다. 나와 시어머니 둘이서 모든 준비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요리 무식자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요리에 흥미가 없다. 그러다 보니 시댁에 가기 전부터 명절 음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만 앞선다.


명절만 되면 극도로 예민해지는 나를 우리 남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시어머니가 다 준비해 주시니 나는 곁에서 도와만 주면 되는데 뭘 걱정하냐는 식이다. 나의 경우엔 그게 더 힘들다. 뭘 해야 될지 모르고 옆에서 지켜만 보는 건 식은땀이 날 정도로 불편하다.


또 다른 이유를 꼽자면, 시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시댁에서 잠을 자는 게 불편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시댁에서는 하룻밤을 보내는데 친정집에 가서는 몇 시간만 앉아 있다가 와야 하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명절이 3일이라면 마지막 날은 적어도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 다음날 남편이 바로 회사에 출근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정집에서는 얼마 못 있고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제일 괴로운 건 시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다음 날 오후 늦게까지 있어도 시부모님은 부족하다고 느끼신다는 점이다. "벌써 가니?", 이 한마디는 내 가슴을 항상 철렁하게 만든다. 효자인 우리 남편도 이 말엔 속수무책이다. 한정된 시간에 우리 친정 식구들과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나는 항상 남편에게 말하고 싶다. 아니 남편이 알아서 지켜줬으면 좋겠다. 설날 연휴엔 우리 엄마 생신이 설 전 날이므로 친정집 먼저 가고 추석은 시댁에 먼저 가서 명절 보내기! 그리고 하룻밤 시댁에서 자면 우리 친정 집에서도 하룻밤 자기!


말은 이렇게 해도 시댁이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친정집 먼저 가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Pre-명절 증후군 때문에 한 번은 남편에게 각자의 집에서 명절을 보내고 오는 건 어떻겠냐고 말한 적도 있었다. 우리 남편은 세차게 거절을 했지만...... 사실, 나 같은 날라리 며느리가 명절 증후군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조금 부끄럽긴 하다. 명절이 끝나면 모든 게 홀가분해져 증상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지기 때문에 명절 전에만 잘 다독여주면 나는 어려울 것도 없다. 그걸 우리 남편만 모른다.


올해 추석은 코로나 때문에 연휴 이동을 제한하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하나 벌써부터 걱정이다.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어가는 이때에 국민 모두의 건강을 위해 이번만 화상으로 명절을 보내면 안 될까?? 절대 시댁에 가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분명 코로나라는 어려운 상황이 우리에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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