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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티나 Feb 02. 2021

내가 사랑한 제인 에어.

제인 에어 _샬롯 브론테

어렸을 때 내가 읽어 내려간 <제인 에어>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동화 같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고전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고아에 작고 못생긴 여자 아이가 힘겨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부잣집의 가정교사가 되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그런 달콤한 로맨스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리고 그 여자 아이가 우여곡절 끝에 연인을 떠나게 되지만, 부자가 되어 그녀의 연인에게 다시 되돌아가 불구가 된 그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결말에 나름 진정한 사랑에 대한 로망을 품기도 했었다.


지금은 <제인 에어>를 단순히 로맨스 소설로만 보지 않는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를 회상해 보면, 나는 600 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의 소설을 완독 할 정도로 끈기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그 당시 읽었던 책은 청소년들이 읽기 편하도록 짧게 편집된 얇은 책이었을 것이다.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그게 아니라면, 인생의 경험이 적었던 탓에 내가 원하는 삶의 프레임 안에 제인 에어를 가둬두고 그 책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차서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을 때, 나는 <제인 에어>의 영어 원서를 읽게 되었다. 책의 두께와 무게에 놀라기도 했지만, 긴 호흡으로 써 내려간 소설 속 인물들의 대사에 나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한 페이지를 넘는 긴 대사가 꽤 있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름다운 문장의 생명력에 감탄을 내질렀다. 난생처음으로 고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책장을 쭉 훑어보니 나는 3가지 버전의 <제인 에어> 책을 갖고 있었다. 영어 원서와 이 원서를 번역한 번역서,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일러스트 에디션까지.. 의외였다. 나는 같은 책을 1권 이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제인 에어>를 사랑한다.


<제인 에어>_ 샬롯 브론테


왜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제인 에어>가 당대에 억압된 여성상에 대한 거부와 자유를 향한 갈망을 잘 드러내면서도 당대의 성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어려운 말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제인 에어의 삶과 내면의 고민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이따금씩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10살까지 외숙모인 리드 부인과 외사촌인 존, 엘리자, 조지아나 그리고 하녀들의 하대와 멸시 속에서 자란 제인 에어는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견뎌내며, 본인의 생각을 결코 힘에 굴복해 꺾지 않았다. 게이츠헤드를 나오면서도 외숙모에게 그녀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똑똑히 말하는 그녀의 솔직함이 좋고,  나쁜 아이들이 가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져 영원히 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라는 브로클허스트의 질문에는 "늘 건강해 죽지 않아야 해요."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순수함이 좋다.


로우드 기숙학교에 입학한 제인은 최악의 식사와 살은 에는 듯한 추위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발진 티푸스의 유행에도 그녀는 살아 남아 공부를 마쳤고, 2년 간 교사 생활도 한다. 물론, 그녀가 견딜 수 있도록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해준 그녀의 친구 헬렌과 템플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로체스터와의 결혼에서도 제인은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을 바꾸려는 로체스터의 시도엔 당당히 맞섰고 그의 정부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엔 떳떳이 거부의 표시를 했다. 그리고 손필드 저택을 도망쳐 나오면서 그녀는 로체스터가 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놔두고 나온다. 제인의 생존 방식은 어떻게든 부딪치고 이겨내고 견뎌내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이런 강인함과 자존심이 좋다.


제인 에어 일러스트 에디션 (긴 내용의 제인 에어를 짧게 축약해 놓은 구예주 일러스트레이터 버전의 동화 같은 제인 에어)


제인은 삼촌이 남긴 막대한 유산도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준 세인트 존, 다이애나, 매리 남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 자신에게 넉넉히 살 수 있는 큰돈이 생겼다는 사실보다 진짜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에 더 기뻐한 제인. 물질적인 삶보다 정신적인 부에 더 큰 가치를 둔 그녀의 용기가 나는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이 당대의 진정한 여성 인권의 삶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 삶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판타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제인이 재산을 잃고 불구가 된 로체스터에게 돌아가서 그의 눈이 되는 삶을 택했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갈망하던 제인은 아이와 남편을 위한 삶을 영위하는 평범한 여성이 되었다.  당대의 다른 여성들이 그러했듯, 자유와 변화를 갈망하던 제인도 사회가 원하고 교육한 그런 여성의 삶을 산다.


내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부분은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던 그 결말에 닿아 있다.


로우드 학교에서 헬렌과 제인이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스케처드 선생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인내하며 화를 내지 않는 헬렌에게 제인이 강하게 맞서야 한다는 대화다.




"착한 사람에게는 너도 착하게 행동하잖아. 그렇게만 되면 좋겠어. 잔인하고 부당한 사람들에게도 늘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한다면 사악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굴 거야. 그런 사람들은 무서워하지도 않고 따라서 변하지도 않고 점점 더 사악해질 거야. 이유 없이 맞으면 상대방을 더 세게 패 줘야 해. 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아주 강하게 맞서서 다시는 우리를 때리지 못하게 해야 해."


"너도 크면 생각이 바뀔 거야. 아직은 네가 배우지 않은 작은 꼬마라서 그래."


<제인 에어> 중



헬렌이 얘기한다. 너도 크면 생각이 바뀔 거야. 교육을 받으면...


헬렌의 말대로 제인은 나이를 먹으면서 교육받은 대로 각인된 그런 여성다움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이 아닐까!


여성이 아닌 한 사회의 일원으로써 능력을 인정받고, 회사의 대표가 되겠다던 나는 이젠 없다. 경력단절이 되더라도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이다. 20대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던 나는, 이제 나와 남편이 일군 아주 작은 세계에서 평범한 삶을 꿈꾼다. 내가 선택한 삶이므로 그에 걸맞은 마땅한 책임도 오롯이 내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인 제인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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