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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티나 May 19. 2020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사표를 내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에 나는 당황했다. 


도대체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노는 것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그렇다고 무기력하거나 우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이 뛰고 설레었다. 



내 나이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피천득 수필집 인연,  '오월' 중)


    

나는 지금 신록이 한창인 아름다운 오월 속에 있다. 이 오월이 다 가기 전에 후회 없이 즐기리라. 







생각도 정리할 겸 집안일을 한번 해보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집안일을 하고 몇 분이 지나자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할 일이 산더미라는 표현이 실감 났다. 남편과 내가 맞벌이였고 나는 특히 해외 출장이 잦았기 때문에 집안일은 둘이 나눠서 하고 싶은 것만 했다. 다행히 둘이 좋아하는 분야가 달랐다. 남편은 세탁과 요리를 좋아했고 나는 정리를 잘했다. 쓰레기 버리기와 화장실 청소는 남편이 도맡아 했다. 이건 남자가 해야 한다고 내가 세뇌를 한 탓에 착한 우리 남편은 별 불만 없이 했다. 대신 설거지를 너무 싫어해서 대부분 내가 한다. 같이하던 집안일을 오롯이 혼자 하려니 어떤 거부터 해야 할지 답답했다.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는 내게 한 번도 집안일을 시키신 적이 없다. 전부 혼자 감당하셨다. 그걸 결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새삼 엄마라는 존재가 내 삶에 얼마나 크게 차지하고 있었는지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엄마랑 떨어지고 나서야 모정이란 것이 가슴에 팍 박히게 된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아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음악도 듣고 나름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자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릴 적 나는 참 꿈이 많았던 것 같다. 

피아노와 플루트를 배울 때에는 음악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 음악학원 선생님이 항상 음악에 소질 있다는 칭찬을 해주셨었는데 그 말을 순수하게 믿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늘지 않는 실력에 나는 슬슬 지겨워졌고 학원을 빠지는 일도 잦아졌다. 아마도 음악학원 선생님은 학원생을 한 명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그냥 으레 그렇게 소질이 있다는 말을 누구에게나 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그 덕에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음악 실기는 높은 점수를 받았었다. 

중학교 때 우연히 방송국 견학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PD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한 동안 PD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영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영화감독에 밀렸었다. 병원에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보며 의사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는데 화학을 전공하면서 그 멋진 흰 가운을 실험실에서 원 없이 입어봤다. 

대학 다닐 때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멋있었다. 가끔 스케치를 해보기도 했지만 재능이 없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그 많던 꿈 중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대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 휴학을 할 때였는데 집에 갑자기 어려움이 닥쳐 학교로 다시 돌아가기 힘들었었다. 내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나는 착잡한 마음에 필리핀행을 선택했다. 어느 교회에서 필리핀 선교를 지원해준다는 말을 듣고 현실도피를 하기 위해 선뜻 나선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선교활동을 단순한 봉사활동으로 잘못 알고 갔을 정도로 종교 관련해서 매우 무지했었다. 그리고 나는 말 그대로 날라리 선교사였다. 전도 방법을 모르니 무작정 밖으로 나가 어린아이들과 놀아주고 심심하면 영어노래와 한국말도 가르쳐주었다.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면 말동무도 되어 주었다. 성경을 모르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었을까? 그래도 성경책은 꼭 끼고 다녔다. 그냥 사람들과 놀아주는 것이 내 하루하루의 일과였다. 

그렇게 몇 달을 하고 나니 동네 사람들이 주일이 되면 나에게 스스로 교회에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선교지에서 내 꿈을 모두 이루었다. 


선교지에는 돈이 없어 병원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나는 가난한 선교사였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그들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선교활동 전 사전 교육을 받았었는데 그때 마사지하는 법, 응급처치 등도 함께 배웠다. 나는 동네 마실을 다닐 때 아픈 분을 찾아가 그때 배운 간단한 마사지도 해주고 그들의 아픔을 그저 들어주었다. 엉터리였던 선교사를 그분들은 의사라 불러주었다. 

하루는 너무 심심해서 영어로 성경 이야기를 모티브로 시나리오를 썼다. 우연히 선교지 교인들이 이 시나리오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내가 감독이 되어 교인들을 가르치고 연습시켜서 연극을 선보일 수 있었다. 연극이라는 것을 처음 해본 교인들은 신이 나서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교회 사람들까지도 초청했었다. 이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음향장비가 없어 교인의 낡은 건반을 빌려 모든 배경 음악은 내가 직접 연주하고 소품과 배경을 파트너 선교사와 같이 직접 그려서 만들었다. 합창이라는 것을 해본 적 없는 교인들도 가르쳐서 연극의 마지막을 합창으로 장식했다. 오합지졸이었지만 피날레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날 받은 박수 소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인생에 악몽 같았던 그 어려웠던 시절도 지금 되돌아보니 아름다운 오월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한파를 이겨내고 봄이 되면 꽃이 활짝 피듯이 마음속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도 싱그러운 햇살이 비쳐주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나는 쉬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는 다 정하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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