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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Oct 23. 2021

B.M.W.

30대지만 장롱면허

나는 BMW를 타고 다닌다.

갓난 공무원이 BMW라고? 아쉽게도 외제차는 아니고 버스(Bus), 지하철(Metro), 걷기(Walking)를 합성한 신조어다. 자차가 없어서 출퇴근은 오로지 BMW에 의존한다. 이 생활에 길들여져서 애써 따놓은 2종 운전면허증이 빛을 바래고 있다. 이대로면 쓰지 못할 정도로 오염이 된다. 운전면허증이 산삼도 아니고 묵혀놓기만 아까워 연습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부탁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후배 Y가 떠올랐다. Y랑은 대학 마지막 학년에 중국으로 동계 어학연수를 같이 다녀 막역한(?) 사이다. 그리고 그는 다름아닌 운전병 출신. 이전에도 Y는 나를 태우고 종종 드라이브를 다닌 적이 있는데, 조수석에서 바라본 그는 운전의 정석처럼 느껴졌었다. 한국사에 전한길 선생님이 떠오르는 것처럼 운전하면 Y였다.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Y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햄 이젠 진짜 운전해야겠다. 이러다가 노총각되겠다. 함 도와도. 소고기 사줄게!"

그는 흔쾌히(소고기라는 단어가 나오고서)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쏘카를 통해 차를 대여하고 Y와 만나기로 한 날, 걱정하지 말라며 처음엔 다 그런거라고 안심시키던 Y덕에 긴장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고 핸들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아서인지 순간적으로 양발을 가지런히 액셀과 브레이크 페달 위에 놓았다. Y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내~떨리는 핸들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운전~'

Y의 흔들리는 동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행히 그날 사고는 없었다.


사람의 기억은 서술형 기억과 비서술형 기억으로 나뉜다고 한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암기하는 기억은 서술형 기억이고 반복되는 행동으로 외워지는 기억은 비서술형 기억이라고 한다. 비서술형 기억은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몸에 배고 나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어릴 때 자전거 타기를 배우면서 중심을 못 잡아 몇 번이고 넘어진 적이 있다. 때론 친구가 뒤에서 잡아주고 또 혼자 자주 넘어지면서 어느새엔 중심을 잡은 채 페달을 계속 밟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전거를 탈수 있게 되니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아도 언제든지 탈 수 있게 되더라. 운전이라는 행위는 비서술형 기억이기 때문에 몸에 배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자차가 없으니 핸들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운전 공포증이 마음을 좀먹고 증식하고 있었다.


지방직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면 당직 근무를 서는 경우가 있다. 당직이란 비상 상황 등에 대비해 소수의 인원이 남아 숙직 또는 일직 근무를 서는 것이다. 우리 구청은 보통 남자 둘 여자 둘 네명이서 근무를 서데 현장에 출동할 일들이 종종 있다. 불법 노점상 단속 요청이라던가 최근에는 코로나 관련 사적 모임 신고가 많다. 그럴 때면 노란색 소형 트럭인 관용 차량을 타고 출동을 하는데 출동 신고가 들어오면 남몰래 긴장하게 된다. 여태까지는 운전하는 사람 한 명쯤은 꼭 있었기에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왜냐면 같이 근무에 들어가는 남자들은 선임이 많았기에 대부분 운전 가능자들이었다. 그런데 나도 짬이면 짬이라고 3년 차 정도가 되다 보니 후배 남자 직원분들과 근무에 들어가는 경우가 생기는 것 아닌가.


어느 저녁 숙직도 그런 날이었다. 후배 남자와 함께 숙직 근무를 서게 되었는데, 당직 반장께서 조심스레 물었다.

"운전하는 사람 있지요?"

자연스럽게 옆에 남자 직원을 바라봤지만 묵언 수행 중인 것이 아닌가. 마주보며 앉은 여자은 자연스레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두둠칫.. 큰일 났다. 당직 반원 전원이 운전을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지다니. 서른이 넘어 운전이 서툴다는 게 처음으로 부끄러워졌다. 남들이 바라보는 서른의 남성은 운전은 당연히 할 줄 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운전을 못한다고 쭈뼛쭈뼛 말하는 내 모습이 참 볼품없었다. 그날 하루 종일 기도했다. 신이 있다면, 오늘만큼은 현장 출동 나갈 일이 없게 해 달라고. 너무나 간절했는지, 기도가 높게 날아, 저 하늘 위에 닿았는지 그날 현장 출동은 없었다.


절대적 결혼 추천론자인 우리 팀장님께서 배를 긁으시며 늘상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남자는 차가 있어야 돼"

"그래야 아가씨하고 데이트도 나가고 하지 꼭 필요해 차는, 그래야 하루빨리 결혼한다이"

일주일에 한 번 주기로 연애에 있어 차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시곤 한다. 대학생 때는 연애도 BMW면 충분했는데. 직장인이 되고선 경제력도 생겼으니 직장 생활에서의 답답함을 교외로 나가서 해소시키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차가 없으면 가기 힘든 곳도 많으니까. 부산에는 기장 같은 교외 쪽에 예쁜 카페들이 많다고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로는 가기가 어려워 차로 이동해야 하는데 현재의 나는 여성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듯하다.

"1003번 버스 타고 갈래요?"

내가 생각해도 구리다. 이대로라면 아름다운 데이트 한 번 못한 채 허송세월을 보낼 것이 분명하다.(안돼, 나는 국가의 출산률 상승에 이바지하고 싶다!)


이제는 차를 중고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그래야 운전도 데이트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매일 중고차 사이트를 넘나들고 있다. 마음 같아선 신형 아반떼를 사고 싶지만 통장 잔액을 열어 본 뒤 중고 아반떼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첫차는 중고차가 국룰 아닌가. 차를 사면 부모님도 태워드리고, 미래의 여자친구랑 교외 데이트도 나가고, 당직 근무도 당당하게 서고 얼마나 좋은가. 팔뚝 소매 걷고 섹시하게 후진 주차하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내년 안으로는 연애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차피 해야 될 거 여태 왜 이렇게 운전을 무서워만 했을까. 운전이라는 산을 넘으면서 한발 더 가까이 어른이 되어가는 거겠지. 나도 외쳐보고 싶다.

"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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