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군대를 전역하고 민간인으로서 갱신이 완료된 20대 중반 무렵, 대학교에서 나의 위치는 꽤 고참에 속했다. 생애 첫 회장이라는 직함도 달았다. 초중고 내내 반장, 회장이라는 자리는 내게 멀고도 먼 직함이었는데, 20대 중반에야 학술 동아리 '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된 것이다.(사실상 술동아리였고 내가 가진 재능은 술자리 광대였다.)
회장이라 하면 모든 게 능숙해야 할 것 같지 않나. 당시에도 언변에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대외용으로 보기에는 꽤 늠름한 선배처럼 보였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스물다섯이 뭐가 그리 만능이고 성숙했겠나. 능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토익처럼 방학 단기로 실력을 쏙쏙 키울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늘 속 빈 강정 같다는 느낌을 갖고 불안함을 애써 지우며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여자 후배와 단둘이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12,900원에 삼겹살 무한리필집. 이 가격에 삼겹살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으니 대학생에겐 무한리필집이 안성맞춤이었다. 여자와 고깃집을 단둘이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테이블 위에 두툼한 삼겹살을 담은 그릇과 집게, 가위가 차려졌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집게를 집고 달가진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렸다. 칙칙- 여기까진 순조로웠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스물다섯 먹고도 고기 굽는데 초집중을 해야 하는 게 맞는지 복잡한 마음을 숨긴 채 집게만 꽉 쥐고 있었다. 고기는 딱 한 번만 뒤집는 게 제일 맛있다는 평이 대세였던 터라, 단 한 번의 뒤집기를 위해 고기의 선홍빛 채도를 살펴본다고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제 다 익었네~'라고 생각되어 고기를 집고 가위로 싹둑 자르려는 순간 물컹함이 손 끝을 타고 전해졌다. 고기가 예리하게 잘려 나가지 않고 녹은 새콤달콤을 떼어내듯 고기가 질기게 잘리는 게 아닌가.
고깃집에서 삼겹살 한 덩이가 제대로 잘려나가지 않아 고군분투하는 나의 모습을 본 후배의 마음은 어땠을까. 짐작이 아니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답답함을. "제가 해볼게요~"라는 후배의 말에 자연스레 가위와 집게를 건네버렸다. 가위가 문제라 잘 안 들었을 수도 있고, 고기가 다 익지 않았으니 불판에 좀 더 익힌 뒤 자르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저 건네줄 뿐이었다. 혼비백산하여 무기와 투구를 내놓고 백기투항하는 패잔병의 심정이랄까. 후배 역시 처음엔 가위질에 애를 먹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은 듯 고기를 잘라냈다. 이미 뻘쭘한 상태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고기 잘 자르네~" 같은 추임새만 반복하며 새끼 새가 모이를 먹듯 고기를 먹었다. 나이 먹고 삼겹살 하나 제대로 못 자르다니. 식사 자리가 끝날 때까지 악마의 속삭임은 멈추질 않았다.
그 이후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라든지,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모임에서라든지, 삼겹살 집 가기가 꺼려졌다. 열세살의 나는 스무 살의 대학생 형이 어른처럼 보였고, 스무살의 나는 복학한 스물다섯의 형들이 어른처럼 보였으나, 어른은 신기루처럼 여전히 저 멀리서 아른거릴 뿐이었다. 삼겹살 굽는 것조차 긴장해야 하는 풋내기 어른. 도대체 내가 그려왔던 나잇값 먹은 어른의 모습은 몇 살 때 발현되는 걸까.
돌이켜보면, 삼겹살 굽기 따위 정말 별 것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긴장되는 이성 앞에서 삼겹살 굽기지만 어쨌든 그 행위 자체는 별 거 아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도 고민을 가진 사람이 제법 많다. 내색을 안 할 뿐, 저마다 다양한 상황에서 별 것 아닌 일로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그리고 회피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나잇값에 한 번쯤 의문을 품어 봤을 것이다. 지인들에게 물어봤다. 별 것 아닌 일로 내가 하찮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는지. 다양한 대답들을 들을 수 있었다. 매듭 묶기가 서툴러서, 하는 요리라곤 라면이 전부라서, 다림질을 해본 적이 없어서, 세금을 몰라서, 주식에 무지해서, 장롱면허라서, 기타 등등.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남이 들으면 의아할 사소함을 스스로는 고민의 영역에 담고 있을 수 있다. 완벽한 어른이란 건 없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다. 지금 내 나이대에서 바라보는 능숙한 40대 직장 선배들도 자기만의 사소한 결핍을 고민으로 갖고 있겠지. 그 결핍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문제로부터 도망가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 잠깐의 물러섬은 괜찮다. 하지만 영원의 도망은 괜찮지 않다. 문제에서 도망갈수록 부담감은 복리로 붙어 언젠가 들이닥친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어떻게 하면 삼겹살을 잘 구울 수 있을까. 자취생 입장으로서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 일이 많지 않지만 운전연수하듯 집에서 삼겹살 연수를 했다. 유튜브에서 고기 자르는 영상을 뇌리에 떠올리며 싹둑싹둑 잘라봤다. 친구들이랑 고깃집 갈 때도 1초 컷으로 집게를 선점해서, 자기가 굽는다는 제스처들을(일종의 클락션) 무시한 채, 도로주행하듯 실전 연수도 착실히 쌓아갔다. 이제는 회식을 가도 내가 굽는 위치라 판단되면 맘 편히 집게를 집는다. 거창하게 연수라고 표현하여 말했지만 누군가에겐 직진코스도 연수가 필요할 수 있는 법이다.다만 도망만 다니지 않고, 문제를 마주하고, 어쩌면 평생을 고쳐나가면서 그렇게 우리는 성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집 골목 모퉁이에 자리한 삼겹살 가게를 지나친다. 회식 모양새로 보이는 이들이 삼겹살을 굽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신입사원인듯 보이는 또래의 청년이 가위와 집게를 쥐고 있다. 옛 추억 속 삼겹살의 물컹함은 잊히고 삼겹살의 노릇함만 떠오른다. 잘 구워졌다. 삼겹살처럼 나도 무르익어가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