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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Sep 21. 2021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그래도 웃어야 모두가 행복하니까

나이를 먹어도 만화가 재밌다.

지금도 소년만화를 보면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정을 느낀다. 늙어서도 마음만큼은 청춘이라는 게 이런 걸까? 요근래 재밌게 본 만화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엔 미소 짓는 히어로가 있다. 웃는다라는 건 상대방에게 안도감을 전해 준다. 그래서 웃지 않으면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지켜보는 시민들이 염려할까 봐 끝끝내 웃고야 마는 히어로가 있다. 모든 이의 히어로 '올마이트' 그리고 그를 동경하며 성장하는 새싹 히어로들의 이야기다.


제아무리 겁나고 아프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초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화 속 히어로들을 쭉 동경해왔다. 언제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 웃음은 전염되어 남을 즐겁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긴장할 때면 즐기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곤 한다. 웃으면서 주문이 발동된다. 반 대항전 축구 시합을 앞두고 그랬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즐기고자 했다. 웃으면 거짓말처럼 한결 마음이 진정된다. 그래서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믿는 편이다. 평소에 잘 웃고 또 남을 웃게 만드는 걸 좋아한다. 웃는 내 모습이 좋다(꽤 매력있다). 움푹 파인 보조개도 좋고 반달처럼 그려지는 눈웃음도 좋다.


사실 웃음이 자리를 잡기까지 여러 역사가 얽혀 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줄곧 웃어왔는데, 웃음으로써 나는 괜찮으니 동정하지 말라고 에둘러 표해온 걸지도 모르겠다. 집이 어려울 때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말에 침울해하면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져서 괜스레 더 웃었는 걸지도 모르겠다. 웃으면 큰일도 별일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시내의 학교로 진학했다. 보통 같은 초등학교에서 인근의 중학교로 진학을 하는 경우가 많은 터라 어촌에서 나 홀로 진학한 나는 교복도 친구도 환경도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키도 작고 끼도 없는 낯선 내게 쉽게 손길을 건네는 친구는 없었다. 전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 있는 까무잡잡한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바닷가에서 헤엄치고, 모래 운동장 위에서 축구를 하던 동지들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엄마에게 전학 가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하셨다. 누군가 깨어놓은 알에서 부화한 새끼 새는 얼마 가지 않아 죽고야 만다. 아마 엄마는 날 둘러싼 알을 스스로 깨길 바라셨던 것이지 않았을까.


물은 오랜 기간 생존의 dna를 대물림 받으며 내려왔다. 북극 곰은 하얗고 고슴도치의 가시는 날카롭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것이다. 나에게 있어 중학교 첫해의 생존 전략은 웃음이었다. 웃는 사람 얼굴에 침 뱉기란 어렵다. 잘 웃고 다녀서였는지 하나둘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농담도 건네고 때론 싸우기도 하며 평범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웃음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입가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비호감을 산 적이 크게 없는 것 같다. 대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상대의 말에 쉽게 잘 웃어서 그럴까. 사람 때문에 힘들게 보냈던 적은 극히 적었다. 아직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만 가득하다. 아, 물론 좋아하는 이성에게는 미소로만 어필이 되지는 않았다.


대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웃을 거리들을 잔뜩 만들어 놨다. 친구들의 웃픈 역사는 마르지 않는 안주가 되어 늘 술자리에 등장하곤 한다. 주로 이성에게 까인 이야기가 재밌는 편인데, 개개인별로 어찌나 흑역사가 다채롭던지 몇번을 들어도 배꼽을 안 잡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친구 K군은 좋아하는 여자 후배에게 고백을 하고 싶었다. 나름 성의를 표하고 싶었지만 수중에 돈이 없었던 K군은 친했던 후배 H에게 오만 원을 사정해서 빌렸다. 그 돈으로 여자 후배를 패밀리 레스토랑에도 데려가고, 꽃도 한아름 사서 건네주었지만 대차게 까이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도 간혹 K군을 '후배 등골 브레이커'라고 부르곤 키득거린다.


나에게도 흑역사가 무수히 많다. 호감이 있었던 여자와 카톡을 하던 중이었다. 남포동을 간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이렇게 답장했다.

"그러면 포동포동해져서 오겠네?"

한동안 친구들은 나를 '포동포동'이라 불렀고 이 이야기 역시 아직도 술안주로 등장하곤 한다. 이런 시답잖은 얘기들은 끝이 없는 테이프처럼 늘 되감아 재생된다. 개그맨들이 하는 어떤 얘기보다도 내 친구들의 지겨운 흑역사가 아직도 제일이다.


이유 없이 키득대던 그때가 그립다. 직장인이 되어 생존을 위해 살아가다 보니 웃을 일이 많지 않다. 어떤 때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웃으려고 일부러 코미디 영화를 보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에게서만 곧잘 웃던 내가, 아주 먼 TV 속 사람들을 통해서야 종종 웃곤 한다. 어른이 되는 건 인간의 가장 기초가 되는 감정들을 숨겨야만 해서 이내 무덤해지게 되는 걸까. 울보였던 아이가 밖에서 울지 않게 되고, 헤프게 곧잘 웃던 아이가 가려서 웃게 된다. 사무적인 웃음만 늘어난다. 업무 부탁을 할 때도 자칫 오해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입꼬리를 올린 채 말하게 되고, 쪽지로 말을 전할 때는 물결표 하나 또는 눈썹 두개는 꼭 덧붙인다. 즐거워서 웃는 횟수보다 웃어야 해서 웃는 횟수가 늘어나는 요즘이다. 그래도 웃어야 한다. 내가 웃어야 가족들이 안심한다. 내가 웃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달리 떠날 곳 없는 직장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잘 웃어야 오래 버틸 수 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순간이 늘고 있지만 괜찮다. 히어로의 말처럼 웃고 있는 녀석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법이니까. 

나는 괜찮다며 또 웃는다.
(히어로 되기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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