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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Sep 19. 2021

새벽의 저주

어둠을 틈타 찾아오는 후회와 불안

어릴 적 두 손을 꽉 쥐어가며 영화 '새벽의 저주'를 본 적이 있다.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옆집 소녀에게 물어 뜯겨 죽은 남편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 그리고 길거리는 그런 좀비들로 가득한 생지옥으로 변해있다. 영화 '새벽의 저주' 이야기다.  좀비들이 후다닥 얼마나 빠른지 다리가 안 보일 정도다. 영화의 주인공 '안나'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수탉이 먼저 일어나 하루의 시작을 알리려고 하는 푸르스름한 때에 예고도 없이 남편은 좀비로 변하고 세상은 생지옥으로 변해 있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새벽의 저주인 셈이다. 그런데 예고도 없는 새벽의 저주가 나에게도 닥쳐오곤 한다.


새벽이 되면 평소에 잠겨 있던 서랍의 문이 스르륵 열린다. 그 안은 후회와 불안이라는 존재로 가득 차 있다. 평소에는 열리지 않는 서랍이고 열 생각도 없는 서랍인데 이상하게 새벽만 되면 자의랑 상관없이 열린다. 뱀파이어 같기도 하다. 대낮에는 잠들어 있다가 날이 저물면 꿈틀대니까 말이다. 세상이 너무 고요해서,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만 남은 것 같아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게 서랍 속 그 녀석들밖에 없어서 그렇게 나는 잠식당한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감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현재의 감정에 대해선 징검다리처럼 뛰어넘는 것 같다.


헤르만 헤세의 시 '나는 별이다'처럼 밤만 되면 노도 치는 바다가 된 것 같다. 돌아올 수 없는 선택들이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때 이랬다면 어땠을까. 그 사람에게 조금 더 최선을 다했다면 어땠을까. 놓친 인연들이 가장 뼈 아프다. 다 내 탓인 것만 같아서. 예전의 후회들이 끝없이 파도치며 일렁인다. 부목처럼 파도들에 무방비하게 그저 휩쓸려 간다. 제일 큰 파도는 미래의 불안이다. 나는 평소에도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불안해하곤 한다. 출근길에 나서고 나서야 가스밸브를 잠그지 않은 게 생각나서 혹시나 가스가 새는 건 아닌지, 어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은 날에는 숨기고 있는 큰 병이 있는 건 아닌지 따위의 불안이다. 새벽은 잠재된 불안들을 엮어 최악의 시나리오를 완성시킨다. 칸 영화제에 출품할 만한 정도의 완성도다. 고요한 적막이 그런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 겹쳐져서 닥쳐오는 새벽. 나는 새벽이 무섭고 그리고 슬프다. 새벽의 저주다.


과거의 후회는 미래의 불안과 터널처럼 연결되어 있다. 서른을 넘어오면서 새벽의 터널이 길어졌다. 새벽 2시부터 6시까지가 터널이 개통된 시간이다. 예전에는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한번 진입하면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요즘 가장 많이 느끼는 불안은 쓸쓸함이다. 퇴근하고 나서 집에 오면 냉기가 서려 있는 적막한 집이 자꾸 떠오른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고, 휴대폰 연락처에는 쉬이 전화를 걸 사람이 없고,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냐는 엄마의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이다. 축복받으며 세상에 태어나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의 임종을 지켜봐 주는 이 없이 천장만 바라보다가 눈 감게 되는 건 아닐까.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의미없이 피고 지는 길가의 꽃처럼 살다 가는 건 아닐까. 가끔 생생한 꿈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 꿈에선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져 끔찍하게 나를 괴롭힌다. 제일 아픈 순간에 눈을 뜬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두 눈에서 이미 흐른 눈물 자국이 옅게 남아 있다. 잔상이 머릿속에 맴돈다. 슬픈 꿈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눈물자국처럼 표식을 남기는 거구나.


아주 어렸을 적, IMF와 맞물려 아버지의 사업이 여의치 않아 자그마한 집으로 이사를 간 적이 있다. 넓은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옮겼는데 주인집 옆의 작은 셋방이 우리 집이었다. 여덟 살의 나였지만 세상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다. 돈이 어떤 것인지 가난이 어떤 형태인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일요일 새벽, 평소보다 이르게 눈을 떴는데 엄마가 누워있던 이불자리에 이불만 개여 있었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는 너무나 허전해서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엄마가 영영 떠났을 거라 생각했다. 정갈하게 개인 이불 앞에서 주룩주룩 눈물이 나오고야 말았다. 두 살 된 여동생을 생각해서 소리는 내지 않고 숨죽이며 흐느꼈다. 3시간 정도가 지났나, 엄마가 붕어빵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알고보니 엄마는 새벽기도를 나갔던 거였다. 엄마도 누군가에게 의지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때 새벽의 아픔이 좀비가 되어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걸까.


학생 때는 엄마도 아직 젊고 나도 취업만 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 같았기에 새벽의 저주를 못 느꼈다. 이제는 엄마의 주름도 깊어지고 취업 후에 더 무거운 어른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아서인지 새벽의 저주가 밀려오는 듯하다. 아, 뱀파이어들은 얼마나 슬픈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환한 빛을 못 보고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얼마나 큰 후회와 불안이 가슴속에 요동치는 것일까. 새벽은 어김없이 매일 찾아온다. 하루 중 가장 이른 손님이다. 이 아픈 새벽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피할 수 있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니까. 후회가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아픈 경고를 해주는 고마운 존재일 수 있으니까. 적인데 알고 보면 아군인 느낌이려나. 엄격한 선생님일 수도 있겠다. 해리포터에서 해리를 위해 어둠의 길을 걷는 스네이프 교수처럼 말이다.


후회라는 싹이 미래의 불안으로 피지 않도록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여전히 새벽마다 가끔은 울고 또 덮어두고 나아가고 자책하고 무시하고 반성하고 웃고 또 울고 그렇게 도톨이표처럼 살아가겠지. 어쩌면 그렇게 살도록 설계된 게 어른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엄마와의 추억과 친구들과의 추억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현재의 추억을 잔뜩 만들어 나가야지. 그리고 새벽에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새벽아, 나 이제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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