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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Sep 25. 2021

혼술남녀

나만의 심야식당

금요일 저녁엔 왠지 혼자서 취하고 싶을 때가 있다.

월요일의 지옥철도 금요일엔 기분 좋은 지하철이다. 웬만하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약속을 안 잡으려 하는 편이다. 항상 내일의 출근길과 회사에서 할 일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공생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금요일엔 이 모든 것들과 잠시 휴전 상태를 가질 수 있다. 아이고 이번 일주일도 참 잘 버텼다. 어른으로 불리는 나이가 되어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다 보니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 나날이다. 어깨를 누르는 삶이라는 바벨이 한해마다 1kg씩 추가되는 느낌이랄까. 나중에 무게에 짓눌리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일주일의 무게를 놓치지 않고 잘 붙들어 맨 스스로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으면 섭섭하다. 맨 정신으로 이 밤을 보내기보다는 조금은 취하고 싶어서 그래서 술을 마신다. 있는 음식에 곁들이는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요새 무라카미 하루키 책에 빠져 있는데,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당장에라도 바에 가서 한잔 걸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이런 문장이 있다.

"위스키를 잔에 따르니 무척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가까운 사람이 마음을 여는 듯한 소리다."

술이야 말로 가장 가까이서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것 아닐까. 위스키가 아니어도 좋다. 더운 여름엔 꼴깍꼴깍 넘길 수 있는 시원한 맥주가 제격이다. 하얗게 차오르는 거품과 목을 넘어가는 청량감을 떠올리면 당장에라도 네 캔 만원 맥주를 사 오고 싶은 마음이다.


술에도 100%이고 싶다. 집에서 마시는 술도 좋지만 퇴근길 무거운 발걸음 그대로 옮길 수 있는 조용하고 따뜻한 식당이면 더 좋겠다. 허기진 저녁을 맛있는 요리와 술 한잔으로 달랠 수 있는 곳. 조금 비싸도 괜찮다. 가격보다는 만족이 더 중요하다. 이럴 때 쓰라고 월급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일반 테이블석보다 주방 앞에 가로로 긴 테이블이 놓인 식당을 선호한다. 흘러가는 지금의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그리고 눈앞에 놓인 술과 음식에 보다 집중하고 싶다. 신주쿠 뒷골목의 간판도 없이 운영되는 심야식당 같은 느낌이랄까. 주인장과 인생 얘기도 하면 멋질 거 같은데 그러기엔 소심한 편이라 조용히 술만 마실 것 같지만. 단골이 되면 그런 곳이 생기려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오카이리(어서 와)"라고 주인장이 반갑게 맞아줄 것 같은 따뜻한 식당이 생기길 바란다.


요즘 취미는 나만의 심야식당 찾기다. 동네를 걷다가 아담하고 정갈해 보이는 곳은 기억을 해두었다가 블로그 검색을 해본다. 내부 인테리어나 음식 사진 등을 고려해 괜찮은 곳은 심야식당 리스트에 올려놓는다. 작은 횟집, 이자카야 등 가볼 곳이 많이 생겼다. 막상 그곳들로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진 못했다. 혼밥보다 혼술이 진입장벽이 높더라. 그러던 어느날은 옆구리가 시릴 허전함이 불쑥 찾아와, 취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오늘은 곧바로 심야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고 다짐했다.


눈 여겨보단 식당 하나가 있었다. 가로가 긴 테이블이 있고 규모도 4 테이블 정도의 아담한 식당. 참돔 유비끼랑 광어 곤부지메 등을 이만 이천 원에 파는 식당이었다. 식당 앞에 이르러 주인장이 횟감을 뜨려고 채를 들고 나왔다. 소심한 나는 잠깐 방향을 틀었다가 다시 용기를 내 문을 열었다. 자연스레 주방 앞 길게 늘여진 테이블에 앉자 주인장이 물었다.

"혼자 오셨어요?"

"네."

그리고 참돔 유비끼와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작은 공간은 이내 만석으로 가득 찼고 그럼에도 시끄럽지 않아 조용히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참돔과 몇 가지 곁반찬이 나왔고 우선 참돔을 한점 집어 먹었다. 탱글 하면서 부드러운 맛이었다. 주인장이 물었다, 맛은 괜찮은지. 나는 무척 맛있다고 답했다. 냉동실에 얼린 듯한 유리컵에 맥주를 따라 마셨다. 일주일의 묵은 때가 이렇게 시원히 벗겨지는 걸까. 혼자 마시는 술이지만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술이었고, 차가운 술이었지만 고독하지 않은 따뜻한 술이었다.


언제부턴가 혼술 하는 날이 늘고 있다. 누군가는 연애를 하고 가족과 보내기에 옆구리가 시린 날이 늘어서다. 혼자에게 기호를 맞추기란 누워서 떡 먹기다. 억지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좋아하는 요리와 술을 즐길 수 있다. 집에서는 일주일에 두어 번은 혼술을 하는 편인데, 직장인이 되고 나서 새로 생긴 생활 패턴이다. 하루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위스키에 빠져 얼음 가득한 잔에 하이볼로 만들어 마시는 재미가 일품이다. 이름 모를 옛날 재즈를 들으며 취하는 재미야말로 직장인의 낙 아닐까. 아. 직장인이면서 솔로인 사람들의 낙이라고 해야겠다. 연인들은 공백 없이 사랑을 나누기 바쁘니까. 가끔 외로움이 사무치는 날이면 심야식당에 들러 한잔 해야겠다. 사람들의 백색소음을 안주 삼아 한잔 두 잔 그렇게 취해가는 맛은 또 다르니까.


식구, 한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심야식당에서 머무르며 한 잔 기울이는 순간이 외롭지 않은 이유는 같은 공간에 똑같이 한 잔 기울이는 사람이 있어서다. 굳이 서로 대화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똑같은 요리를 먹으며, 한 잔 기울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통분모로는 충분하다. 그 순간만큼은 다 함께 맛있게 술을 마시는 식구 아닐까.


공시생일 때 '혼술남녀'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공시생과 학원 선생님의 이야기라 위로받는 느낌으로 챙겨 봤다. 노량진의 스타강사 역할로 나온 하석진이 맛있는 요리에 술을 혼자서도 무척 맛있게 곁들여서 따라해야지란 생각을 했었는데 서른이 넘어 이루게 되었다. '혼술남녀'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다양한 이유가 나온다. 누군가에게는 위로이고 도피이고 선물이고 힐링이다. 상황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사람의 기분에 따라 혼술의 맛이 달라진다. 지금 나에게 혼술은 어떤 맛일까.

쓸쓸함에 대한 위로일까, 고단한 하루에 대한 선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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