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브랜드 경쟁 PT를 하다가
프랜차이즈 고시 학원 브랜드 PT를 했다. 카피라이터들에겐 경험해보고 싶은 업종 위시리스트가 있는데 나는 자동차, 피로회복제, 교육에 관심이 있었다. 내가 관심있던 교육이란 정확히는 청소년 입시교육인데 고시라니 뭔가 너무 큰 무게감이 느껴졌다.
광고주의 고민은 이러했다. 실제 점유율 1위는 우리인데 과도한 미디어 노출로 가짜 1등들이 판을 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자코 있던 진짜 1등이 처음으로 광고를 결심한 거다. 모델은 남자 래퍼 B로 정해져 있었고 그의 노래를 개사하여 카피를 써야한다고 했다. 원래 사람들은 광고를 잘 보지 않지만 요즘은 더 안 본다. 그래서 흘러가는 광고가 되지 않으려 노래를 활용해달라는 광고주가 그동안 많았다. 심지어 이번에는 랩이다 보니 라임도 맞춰야 하고 너무 공손한 말투는 멋이 없어져버려 까다로웠다. 이러다 언젠가 팀에서 누구 한 명은 부캐로 래퍼 데뷔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고시 합격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는 ‘최종병기’라는 컨셉을 생각했다. 모델 B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군사들이 고시패스를 상징하는 두꺼운 철문을 최종병기로 부수고 들어가는 비주얼이다. 개사한 가사에는 이런 카피들이 들어갔다.
합격문 뿌셔보자 이번에 붙어보자 / 영어 1타~!(문을 때림)
/ 합격에 무적 / 합격 앞으로, 돌격
상징적인 건 좋지만 문제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갔다는 거다. 문이면 문, 최종병기면 최종병기, 1타면 1타. 이런 요소들을 각각 별개로 보고 하나를 정해서 쉽게 만들어야 했는데 내가 정한 컨셉에 모두 연관성이 있는 것들이라 생각해 한 덩어리로 본거다. 그래서 얘도 더하고 쟤도 더하면 더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아이디어와 계획이 틀어진다.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고 아무리 봐도 뺄 건 하나도 없는데 실행하려고 하면 그때서야 너무 버거워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해 계획을 짰는데 당연히 2월인 지금, 고비가 찾아왔다. 이것도 저것도 하고싶은데 여러가지 핑계로 할 수가 없었다. 쿨하게 포기도 못해서 스트레스만 받고있던 중에 고시학원 PT를 떠올렸다.
‘또 이것저것 다 하려다 죽도 밥도 안되지. 흰 죽 하나를 쑤더라도 맛있게 쑤자…’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외국어, 도예, 소설 습작, 브런치, 책 읽기, 콘텐츠 리뷰용 인스타 부계정, 기타 등등을 하고싶었다. 내년이 되면 죽는 것도 아닌데 올해가 이십 대 마지막이라는 것 때문에 내심 초조했던걸까. 선택과 집중은 '포기'가 아니다. 지금 선택한 것들을 위해 잠시 미룬 것들은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이번 PT에서 팔지 않고 메모해놓은 아이디어는 다음 PT에서 다른 모양으로 쓰여지고, 20대 초중반에 삽질하고 다니느라 생각만 했던 에세이 쓰기는 29살에 그 삽질을 기반으로 쓰여지고 있다. 지금 미루어놓은 소설 쓰기는 30대가 되어 쬐끔 더 성숙해진 내가 더 잘 쓰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중대한 '선택과 집중'은 그냥 '첫번째 선택과 집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