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제리의 최애 인형을 찾아서...
우리 집 셋째 고양이 ‘제리’는 귀와 눈은 큼직하지만, 코와 입이 앙증맞고 얼굴도 작고 동그란 편이라 종종 아기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하는 네 살짜리 고양이다. 오렌지 브라운 털을 가진 아비시니안종으로, 흔히 이집트 벽화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생겼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도도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무엇이든 잘 먹고, 수다스러운 애교쟁이에 낯선 사람도 좋아한다. 그런 녀석에게도 까다로운 종목이 있었으니, 바로 장난감을 고르는 기준이었다. 다른 고양이들은 바스락거리는 미끼가 달린 낚싯대를 흔들어주면 환장하고 달려드는 반면, 제리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다. 지금까지 녀석에게 장기간 사랑받은 장난감들을 이런 것들이었다.
1. 보송보송 강아지풀이 달린 어묵꼬치형 장난감
2. 스웨이드로 만든 얇고 긴 줄
3. 바스락거리는 셀로판지를 넣은 작은 인형
이 중에 3번이 제리에게 아주 특별했다. 독일 뮌헨 여행 중에 작은 펫숍 구석에서 발견한 다람쥐 인형이었다. 손톱만 한 산타 모자를 썼고, 검지 두 마디 정도 되는 작은 몸통에 꼬리는 북실북실한 털실이 달려 디테일이 좋은 편이었다. 만져보니 속에는 바스락거리는 비닐도 들어있었다. 제리가 좋아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집어 들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녀석의 사랑을 듬뿍 받는 묘생 장난감이 될 줄은 몰랐다. 던지면 물어오고, 물고 있는 걸 빼앗으려 들면 으르렁대면서 신나게 도망갔다. 본능을 건드리는 매력이 있는 건지 다람쥐 인형을 꺼내면 파라오 곁에서 쥐를 잡던 조상 묘들의 야생성이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나와 반려자(이후 휴먼 내외)는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던 제리의 애착 반응에 신기해서 그 다람쥐 인형을 특별히 제리의 '친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제리의 침으로 범벅된 그 ‘친구’는 운명에도 없던 서울로 와서 1년 가까이 혹독한 삶을 살다가, 산타 모자와 북실북실한 꼬리를 잃은 비루한 모습으로 실종되었다.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 쥐돌이들의 단골 실종 장소인 냉장고 아래와 침대 밑까지 샅샅이 다 뒤졌지만, 독일산 ‘친구’는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이후 똑같은 인형은 찾을 수 없었다. 휴먼 내외는 제리의 야생적인 즐거움을 되찾아 주기 위해 비슷한 인형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인형은 다 사들였고, 심지어 해외 반려동물용품 사이트나 아마존닷컴에서 제품보다 비싼 배송비를 지불해가면서 손가락만 한 인형들을 직구했다. 그러나 제리는 그런 휴먼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냉정했다. 그렇게 다정하고 수다스럽던 녀석이 장난감 앞에서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본능에 충실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배송받은 인형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제리에게 던져주었지만, 녀석은 대부분 냄새 한번 킁킁 맡고는 매몰차게 돌아서버렸다. 어쩌다 한 번은 살포시 새 인형을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때뿐이었다. 얄미운 희망고문을 당할 때면 우리는 더욱 좌절해서 죄 없는 장난감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에이 C 안 해! 안 해!" 퇴짜 맞은 쥐새끼들이 반년 간 책장 구석에 수북이 쌓여가고 있었다.
하다 하다 안 돼서 묘객님의 니즈를 파악해 직접 가내수공업을 해보기도 했다. 인형의 구조는 생각보다 간단하니까. 수많은 실패를 통해 알아낸 아래 조건을 잘 반영해서 한 땀 한 땀 만들어나갔다.
1. 짧은 극세사 천 혹은 니트 재질로 만들 것
2. 속에 바스락거리는 소재가 들어갈 것
3. 물었을 때 주둥이 그립감이 포실포실할 것
4. 6cm ~ 10cm 이내의 크기일 것
극세사 양말을 8cm 내외로 작게 자른 후 속에 셀로판지를 넣고 바느질로 봉했다. 보기 좋게 자그마한 눈알도 달아 제리에게 던져줬고 다시 한번 긴장의 순간…!이라고 할 것도 없이 수제 인형은 처참하게 거절당했다. 아무래도 조악한 손재주로 인해 너무 단단하게 만들어진 건 아니었을까. 기술가정 시간에 가정보다는 기술 시간을 흥미로워하며 납땜을 즐기던 나의 과거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이게 뭐라고...
그러던 어느 날, 제주 여행을 갔다가 남미 소품을 파는 곳에서 우연히 니트 재질의 손가락 인형을 발견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휴먼 내외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제리 친구!’라고 외쳤고, 부푼 마음과 인형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얼기설기 니트 재질로 만들어진 사자 인형 속에 바스락 비닐을 넣고 감침질로 마감했다. 니트 재질이라 단단하지 않았고, 기분 좋게 포실포실하면서 바스락거렸다. 뭔가 느낌이 좋았지만 지난 6개월 간의 험난한 여정이 뇌리를 스치면서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우리 둘 다 손을 모으고 ‘제발 제리야 제발’을 외치며 제주에서 만난 남미산 ‘친구 후보’를 제리에게 던진 순간, 우리는 보았다! 독일산 ‘친구’를 물었을 때처럼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재빨리 채가는 제리를 직관했다. '친구 후보'는 제리의 주둥이에서 공중으로 붕- 띄워졌고, 오른발 펀치를 맞아 급격히 커브를 틀었다가 왼발로 낚아채졌다. 갈고리 같은 왼발 발톱에 걸려 이미 올이 느슨해진 사자 인형은 앙증맞은 주둥이로 다시 옮겨졌다. 제리는 동공이 커진 흥분의 상태로 잠시 멈춰 우리를 쳐다보았다. 빨리 뺏으러 오라는 듯이. 굉장히 순식간에 지나간 장면이었지만, 우리의 눈에는 골 장면을 리플레이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선명한 슬로 모션이었다. 예상치 못한 골이 들어갔을 때처럼 1초의 정적에 이어 귓가에 기쁨의 함성이 울렸다. 드디어 물었다! 입질이 왔다! 게다가 돌아온 야성적인 으르렁 소리에 스스로 던지고 잡기까지! 월척한 강태공의 손맛 저리 가라의 희열을 느꼈다. 휴먼 내외는 부둥켜안았다. 말 못 하는 반려동물의 취향을 저격하는 일은 무척 고되고 길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 끝은 짜릿했다. '친구 후보'는 곧바로 남미산 '친구'로 승격되었다.
며칠 뒤 여분의 손가락 인형을 주문했다. 남미산 ‘친구’가 실종되더라도 제리에게 바로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 줄 수 있도록. 우리는 요즘도 던지고 물어오고 뺏기도 하면서 신나게 집안을 뛰어다닌다. 고양이가 신나면 휴먼도 행복하다. 우리는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살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