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BI 와비 Feb 15. 2022

가려진 달

개기 월식이 있던 저녁, 가슴에 새겨진 한 사건에 대하여

 2021년 11월 19일 저녁, 금세기 가장 긴 부분 개기 월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세상은 그 사실에 떠들썩했지만, 나는 그저 하늘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을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이 광활하고도 폐쇄적인 멀티플렉스 몰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언제부턴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없는 이런 대형 몰에 매우 취약한 인간이 되었다. 그중 가장 최악의 공간은 바로 여기 코엑스. 볼만한 박람회는 죄다 이곳에서 열려서 어쩔 수 없이 오지만, 올 때마다 숨을 참고 물속에 뛰어들 듯이 무거운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다.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버텨도 이곳에서 나의 정신적 폐활량은 고작 60분 남짓.


 박람회에 전시된 공예품들의 시각적 자극에 매료되어 정신적 폐활량의 한계가 간당간당했다. 탈출을 서둘러야 했다. 실제로 쓰러지거나 하는 심각한 증세는 아니지만,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처음엔 멍해지고 이내 멍청해지다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다른 처방은 필요 없고 탁 트인 곳에서 하늘만 볼 수 있다면 정상화된다. 코엑스몰의 지하 통로로도 지하철역에 갈 수 있지만 그 시간도 견딜 수 없이 답답했기에 별마당 도서관이 보이자마자 냉큼 야외 출구로 나왔다. 


 밤하늘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최악의 미세먼지를 머금은 공기는 모래 냄새가 나고 몹시도 탁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코엑스몰의 퍼석하고 희박한 공기보다는 나았다. 이제야 제대로 숨 쉬는 느낌이었다. 그때 내가 올려다본  밤하늘에서는 부분 개기월식이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던 나의 눈에는 그저 미세먼지 가득한 희뿌연 하늘에 뜬 흔한 초승달이었다. 그저 숨을 쉬기 편한 그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뭣모르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밤공기에 으슬함이 몰려오자 가방에 넣어뒀던 코트를 꺼내 입고 삼성역을 향해 걸었다. 


 역 입구에서 한 할머니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과일을 팔고 계셨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답답한 마스크를 벗고 싶은 생각에 발걸음을 서두르던 찰나라 눈으로만 훑고 지나치려는데, 그 순간 작은 열매가 ‘빤짝’이는 게 보였다. 뭐가 저렇게 광이 나지? 순간적인 궁금증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했다. 뇌와 다리가 바로 연결된 것처럼 거의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되돌아가며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방울토마토가 아닐까 했던 열매는 빨갛게 여문 동글동글한 대추였고, 할머니의 왼편엔 반시 두 박스가 숨긴 듯 진열되어 있었다. 행여 행인들의 동선에 방해될까 번듯이 내놓지도 못한 감들 역시 말간 빛깔을 내며 가지런하게 박스에 담겨있었다. 다리 사이에 대추가 한가득 담긴 빨간 소쿠리를 놓고 한 알 한 알 정성스레 닦고 계신 할머니를 보는 순간 나의 반려자가 대추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대추를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인지 반려자가 대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결정을 내리며 퍽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다른 과일을 닦고 있었다면 나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데, 흔쾌히 살 수 있는 대추라서, 내가 필요한 대추라서 진심으로. 할머니가 맛있는 대추를 정성스레 수확하셨기 때문에 제값 주고 그 수확물을 사는 것이지, 동정해서 돈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서.


 광택제 바른 식물의 이파리처럼 빨갛고 동그란 대추가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에서 탱글탱글 빛을 내고 있었다. 반짝이는 보석처럼 그 빛은 매혹적이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노인의 결정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역에서 많은 노점상을 봐왔지만, 그저 멍하게 앉아있거나 팔기 위한 멘트를 날릴 뿐 그 누구도 묵묵한 움직임과 빛으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적은 없었다. 


대추, 얼마예요?

만원이에요.

바구니 전부요?

네에.

주세요!


 마침 지갑에 있던 만원을 건네자 할머니는 담뿍 웃으면서 검정 비닐봉지에 소쿠리 속 대추들을 쏟아부었다. 야무지게 여며 건네주시는 비닐봉지는 구겨져서 끈적거리는 것이 재활용된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도 마음이 갔다. 이미 객관적일 수 없는 지경으로 이 대추는 내게 특별한 과실(果實)이었다. 묵직한 봉투를 받을 때 아주 잠시 할머니의 손과 내 손이 섞였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순간 바스락대는 봉지 손잡이 사이로 손가락이 잠시 겹쳐진 것에 불과했지만, 고맙다는 말들이 얹어지자 할머니의 주름진 양손이 내 손을 꼬옥 포개어 잡은 것만 같았다. 어딘가 처연한 그 감사함이 머릿속을 통과해 가슴에 물수제비를 떴고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지하철역 구석에서 쪼그려 장사하는 할머니가 처음에 안쓰러워 보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할머니의 수확물을 다시 살펴보고는 좋은 대추라고 생각해서 구매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는 내 저변에 깔린 동정심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고맙고 고맙다며 꾸밈없는 마음을 내게 전하셨다.


 ‘나는 왜 이토록 최선을 다해 사는 분께 그런 모독적인 마음을 잠시 품어서는…’


 할머니 대추 정말 좋아서 산 거예요. 그렇게까지 저한테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고마워하지 마세요. 이 말을 하고 돌아서고 싶었다. 끝까지 나의 위선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배가 되는 위선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나았다. 봉지를 받아든 나는 아무말 없이 승강장으로 향했다. 끈끈하고 무거운 검은 봉지를 여며 백팩에 넣었다. 


 지하철을 타던 그 시각 아마도 부분 개기월식은 끝났고, 할머니 역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달과 지구와 태양이 만드는 희한한 광경 대신에, 대추 한 알이 뿜었던 광채가 선연히 새겨진 밤하늘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려진 달은 내게 아무 감흥도 남기지 못했던 밤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친구'를 찾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