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사랑은 톨게이트 수납원 <3부>

#평범한 네가 좋았어. 그냥.

by 승혁

내 첫사랑은 톨게이트 수납원 <2부>와 이어집니다.


- 3부 -


오늘따라 유난히 동쪽으로 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잠에서 깼다. 매일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던 습관 때문에 순간 흠칫 놀라긴 했지만, 주말이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를 깨운 따사로운 햇살의 괴롭힘보다 주말이라는 안도감과 베개에 스며든 샴푸 냄새가 몇백 배는 더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누가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딱히 잠이 오지 않았지만, 괜스레 평소보다 더 게으름을 피워야겠다는 갖은 변명을 스스로에게 둘러댔다. SNS를 켜보니 그간 접하지 못했던 친구들의 소식들이 쏟아졌다. 아, 친구라기보다는 비즈니스 관계의 ‘지인’들의 소식이 더 많았다.


어떤 이는 초수(初手)에 임용고시에 붙어 국어 선생님이 되었고, 임용고시를 준비했던 방법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는 캐나다로 해외 어학연수를 떠났지만, 출국 당일 아침에 헤어드라이어를 쓰는 바람에 이를 두고 떠나 속상해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는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 축하 영상을 제작하여 본 사람들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축하 댓글을 달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의 소식을 (원치 않아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때론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핸드폰을 손에 놓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사람의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수의 소식.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지수를 추천합니다!”


아마 지수를 처음으로 본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갓 중학교를 졸업한 질풍노도의 학생들이 초반 서열 싸움에 목숨을 걸던 때, 나는 누가 보아도 그 싸움에서 밀려난, 아니 스스로 먹이 사슬에서 하위 생물을 자처했다고 볼 수 있는 학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감이 많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성적도 평범, 외모도, 키도 평범, 운동도 매우 잘하는 편도 아닌 그런 평범한 객체였다. 나는 그렇게 초반 경쟁에서 밀렸고, 이후에 주위 친구들마저도 나를 그저 그런 평범한 친구로서 대했다. 덕분일까. 다행히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지만, 반대로 나서서 괴롭힘을 받는 친구들을 구해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수는 달랐다. 저번에 말했다시피 이미 부잣집 딸이라는 소문은 전교에서 유명했고 성격 또한 이에 걸맞게 자비로웠다. 마냥 포용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귀여운 편에 속하는 외모와는 다르게 강단이 있었다. 불의에 민감한 친구였고 이를 바로 잡아야 했다. 언제는 한 번 윤리 선생님의 사상적 발언에 한 교시 내내 논쟁을 펼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내가 더 긴장했었지만 한 학기가 다 지나갈 때쯤 되니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는 진리를 알게 되어 되려 고마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 가끔은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2년쯤 꿇은 선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성격 때문일까. 공식적인 서열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임원 선거에서 이미 챔피언은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자원하지 않고 추천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지수 옆에 서 있는 부회장이 된 친구를 보며 마치 체급이 맞지 않는 두 선수가 링 위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물론 지수의 체급이 높았다. 지수의 그 특유의 강하고 밝은 기세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지수가 우리 학급의 임원이 된 이후 학기 초반의 서열 싸움은 빠르게 안정적인 생태계를 조성했다. 나름의 체계와 규칙이 생기고 모두 이를 잘 따랐다. 물론 중간중간 잡음이 있기도 했지만 능숙하게 해결하는 지수를 보며 직접 감탄사를 내뱉진 않았지만 속으로 남모를 경외심을 표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지수랑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볼 시간은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정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우리 교실은 여름 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의 최대 관심사는 자연스레 방학식에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노래방이나 PC방을 갈까, 맛있는 걸 먹으러 갈까, 1학기 마지막으로 다 같이 공을 찰까 등 각양각색의 의견들이 나왔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그중 나의 발언권은 딱히 없었다. 아무렴 어때, 친구들과 재밌게 보내는 게 중요하지. 하지만 방학식 당일 약간의 문제가 생겨버렸다.


방학식 청소 당번에 걸린 것이었다. 모두 알겠지만, 개교기념일 혹은 공휴일 전날에 청소 당번이 걸리는 것만큼 시간 아까운 일이 없다. 대부분은 날 보며 푸하하 웃었고, 일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나를 뽑은 담임 선생님도 겸연쩍게 웃음을 보이며 마무리를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다. 덕분에 친구들과의 일정에는 뒤늦게 합류를 하기로 했다. 그와중에 이참에 사물함 내부도 한 번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보면 나도 참 줏대없다 생각했다.


방학식.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 날에는 하교 종소리가 들리면 치타를 피해 도망치는 가젤처럼 너나 할 것 없이 학교를 빠져나간다. 그 광경을 교실에서 보고 있으면 가끔은 도심에서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기도 했달까. 쓸데 없는 생각말고 자, 빨리 청소를 해볼까.


하지만 청소 당번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지수였다.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임원이라 남았다는 지수의 말이 왠지 모르게 날 배려해 남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 그래?’라는 나의 어색한 반응과 함께 침묵이 흘렀다. 이 어색한 공백을 만든 나를 자책하며 이마를 탁, 쳤다. 생각보다 화들짝 놀란 지수 덕에 어색한 공기는 저 무한대로 깊어졌다. 헛기침하며 지수는 칠판지우개를 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고 반사적으로 나는 그와 멀리 떨어져 바닥을 쓸었다. 내가 책상 줄을 맞추고 있을 때쯤 지수는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수는 나를 보지 않은 채로 창밖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평범해서 좋았어, 너.”

“...?”


아까와 같은 어색한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지수가 한 말을 곱씹어봤지만 도통 무슨 의도로 말을 한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으니 없는 칭찬이라도 지어낸 걸까, 아니야 혼잣말일 거야 하고 대충 넘겨짚었다. 의도하지 않은 침묵이 흐르자 지수는 ‘아냐, 됐어’라는 말과 함께 ‘방학 잘 보내’라고 손을 흔들며 교실을 나갔다.


한 학기 동안 지수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거라곤 바로 오늘, 딱 한 마디였다. 심장이 뛰었다기보다는 이른 아침 햇살을 받은 꽃봉오리가 약간 벌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조금은 마음을 터놓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다음 학기에는 조금 더 말을 걸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과 노는 내내 지수가 내게 한 그 말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도대체 평범한 게 뭐가 좋다는 걸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해답을 내렸다.


평범한 것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한 번 눈에 들어온 작고 사소한 평범함은 계속 쳐다보게 된다.

내가 너의 평범한 모습을 눈에 담고 좋아했듯.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시작됐다.


하지만 오늘 본 지수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내 첫사랑은 톨게이트 수납원 <3부> 끝.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일러스트 작가 ‘집시’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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