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근차근 ‘나답게 사는 법’
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금요일을 책임졌던, 또는 책임질 TV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모 케이블 방송 채널에서 진행하는 ‘하트시그널’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직업과 나이를 비롯한 개인 신상을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남녀 3쌍이 한 숙소에 머무르며 진짜 사랑을 찾아가는 매칭 프로그램이다. 더불어, 이들을 비참여 패널들이 지켜보며 서로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맞추는 ‘러브 추리 게임’ 형식의 포맷(format)을 띄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한낱 지나가는 프로그램을 굳이 글까지 써 내려갈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이상한 점은 이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하면서 몇 가지 진지한 인생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접했을 때의 내 나이 23살. 물론 지금도 왕성하지만, 돌이켜보니 저 때야말로 20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초절정의 나이였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처음에는 그저 여성 참가자의 겉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마음속으로 ‘이분은 웃을 때 정말 예쁘시네’, 혹은 ‘이분의 직업은 무엇일까?’ 등의 굉장히 1차원적이고 피상적인 궁금증을 스스로 자아냈다. 단지 겉모습만 보고 가슴이 쿵쿵 뛰었고, 참가자가 가진 직업에 따라 호감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졌으며, 가끔은 더 나아가 나만의 이상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던 나였다.
당시, 매주 금요일을 목이 빠질 듯이 기다린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저 ‘이번 회차에서는 어떤 에피소드가 우릴 설레게 할까?’라는 분홍빛 기다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24시간 중 단 몇 분, 아니 몇 초에 해당하는 ‘에피소드’에 불과한데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짧은 ‘순간’을 ‘전체’로 착각할 때가 종종 있다. 마치 그때의 모습이 그 사람의 본질인 마냥 말이다. 예를 들어, 한 참가자가 ‘저는 13.5도 되는 와인(wine)을 좋아해요’ 라거나, 혹은 ‘저는 스킨스쿠버를 안 하면 잠을 못 자요’ 등의 대화를 이어나갔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참가자는 살면서 13.5도의 와인만을 먹지 않을 것이며, 취미로 스킨스쿠버 외에 뜨개질을 하거나 온라인 게임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이들이 와인 말고 소주를 택했을 때 그 행동에 대해 ‘너답지 못해’라는 반문을 품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아픈 화살을 당기기도 한다.
그때 든 생각, 과연 ‘나다움’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한다면 나는 어떤 말을 전해야 할까? 얕지 않은 고민을 거듭했지만 명확한 해답은 내리진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는 존재는 어떤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일을 통해서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이 흔들릴 수도 있고, 어떤 날은 남색 셔츠보다 하얀 스웨터가 좋은, 그런 날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순간’들이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순간’들을 겪을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혼란스러워해야 할까? 아니, 그 모든 순간들이 곧 나일 것이다. 지금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시즌 2가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말 그대로 설렘 수치는 두 배로 늘어났다. 철이 덜 든 모양인지 공개되는 회차마다 참가자들에게 깊은 감정이입을 했고 행동 하나, 하나를 곱씹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들의 행동을 따라 해보고 싶어 졌다. 우리의 두 눈으로 보는 화면들은 분명 방송국 관계자들이 의도한 화제의 장면일 것이다. 이는 분명 많은 시청자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혹은 앞으로의 상황의 전개에 있어 기폭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장치일 것이다. 또 문득 스치는 생각. 그렇다면 실생활에서도 이렇게만 행동한다면 상대방에게 호감을 얻을 확률이 높아질까? 우선 다음 상황을 상상해보자.
화면 속에서 두 남녀는 평창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침 눈이 내렸고, 이들은 분위기 좋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거의 없었고, 조명은 은은했다. 달콤한 카레(curry)와 크림(cream) 향이 뒤섞여 식당 내부를 감쌌고, 이들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음식은 정갈하다 못해 동화 속에 와 있는 듯했고 이들은 때마침 서로가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남자는 갈색빛 선물 상자 속에서 헌 책을 꺼내며 ‘내가 소중히 읽은 책을 선물해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라는 말을 전했다.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는 남녀와 하하호호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 화면이 페이드 아웃(fade-out)된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눈을 맞으며 함께 길을 걸었다.
숨 막히게 설레는 장면들의 연속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은 남성 참가자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단순하게 ‘저 말 너무 좋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과연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저런 진심 어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깊은 물음이 앞섰다. 문득, 말과 행동에도 일종의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과 행동에는 이를 수행하기 위한 자격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자격을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 이것 또한 정답은 아니겠지만, 스스로 내린 해답은 ‘보고 베끼면 된다’라는 것이다. 많이 보고, 듣고, 배운 내용을 한 번 활용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활용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상대방의 반응이 좋다면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은 의식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내 몸에 축적된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자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위 친구들, 선후배, 혹은 책과 수업 속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다면 이를 한번 따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위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앞둔 지금, 마음은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를 위한 방패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취업전선에 곧 내몰릴, 아니 사실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에 놓여있는 지금 하트시그널 시즌 3가 시작됐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이상한 고민을 스스로 던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심장이 뛰었다.
회차가 어느 정도 흘러간 상태에서 드디어 참가자들의 직업이 공개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직업을 듣고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가 나부끼는 갈대처럼 휙휙 바뀌었을 텐데, 이번엔 다른 생각이 내 가슴을 헤집고 들어왔다. 한 여성 참가자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정비사였고 한 남성 참가자의 직업은 세상에서 멸종된, 혹은 소외된 야생동물의 모형을 본뜨는 조형 작가였다. 이들이 이런 진로를 결정하게 된 계기를 듣게 된 순간, 그것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를 대변할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진로 결정에 있어서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봤다. 이상적인 말로 ‘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주체인 삶을 살렴’ 하고 생각하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고민의 해답은 첫 번째 문단의 물음과도 같은 맥락일 수도 있겠다. ‘나’라는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까. 어떤 직업, 혹은 어떤 활동이 나랑 맞을까에 대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겁이 많아졌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나를 덮쳤다. 결국은 나도 모르게 편하게 돈 많이 버는 일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말이다. 참 이중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내 또래와 같은 참가자 이들은 행복해했다. 아니, 적어도 자부심은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촬영이기 때문에 좋은 말을 했다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들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일단 뛰어 들었던 이들이 참 멋있고 부럽게만 느껴졌다.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에도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었던 것 같다. ‘재능이나 소질이 없는데 어떡하지?’라는 반문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명확하진 않지만 가고자 하는 전체적인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뭐 고작 프로그램 하나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 삶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귀여운(?) 푸념으로 생각하려 한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나’ 일 것이다.
하암, 하트시그널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