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서 고생하세요? 下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by 승혁

이 글을 읽기 전, 유념해둘 사항이 있다.

아래의 모든 텍스트는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제목이든 뭐든 이 글이 조금이라도 궁금하다면 조금 더 호기심과 탐험력을 발휘해 이전 글을 읽고 오시는 걸 추천한다.




지금 필자가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행동은, 아니 이 ‘움직임’은 어떠한 결과물을 낳는다. 설사 그 행동이 아무 의도가 없다 할지라도 어떠한 결과물로써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이 논리로 미루어보면,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 성립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움직임이 어느 이에게, 어떻게, 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인스타그램에 부계정을 따로 두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으려고 만든 그야말로 ‘의도적인’ 채널이다. 오롯이 필자 자신의 성공을 위한 의도로 시작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종종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유저(user)들이 흔히 말하는 ‘하트’를 꾹꾹 눌러주고, 하다못해 댓글을 달아 때로는 격한 공감과 위로를 표하거나 때로는 냉철한 비평을 해줄 때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떤 날은 장문의 디엠으로 서로의 고민까지 털어놓은 기억이 있다.)




분명히 이와 같은 움직임은 필자 스스로를 위해 시작한 개인적인 일이지만, 이 움직임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단 1초라도 생각해볼 수 있는 독특한 화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그 이상 ‘감정’이란 것을 느끼고, 흔히 말하는 ‘왜 사서 고생하는 거 같지?’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왜? 나는 누군가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온전한 고유의 여러분인가? 필자는 맨투맨보다는 정갈한 셔츠를 좋아하고, 활력이 넘치는 헬스장보다는 아기자기한 카페를 좋아한다. 욕 중에서는 ‘병신’, ‘장애인 같다’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고 봉골레보다는 크림 파스타를 좋아한다. 최근 들어서는 투명 플라스틱 배출에 희열을 느끼는 중이며 플라스틱 빨대를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




자, 이런 다소 괴팍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필자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태어날 때부터 이랬을까? 정답은 당연히 아니다. 괜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혹여 신께서 인간이 만들 때 말 그대로 ‘무(無)’의 상태로 빛을 보게 했을지라도, 우리는 그 빛과 동시에 산부인과 의사와 그 옆의 간호사, 지금의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벌써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며 태어난다. 더 과장해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태교 때부터 클래식 혹은 힙합을 듣는 것에 따라 지금의 움직임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자고로, 필자의 어머니는 태교를 할 때 된장찌개를 그렇게 드셨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만약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단둘이 남았다고 하면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기쁨과 증오와 사랑 등 많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너무 일을 만들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효율성은 제로(zero)인.”




바로 위의 친구 말처럼 저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또 어쩌면 우리에겐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필자는 가장 마지막 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효율성’이다. 짐작건대 친구는 회사 일 혹은 교우 관계 등에서 어떠한 환멸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겠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것 말고도 육아와 가사, 혹은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효율성에 대해서 재고해볼 수 있다.




과연 효율성이 제로(zero)인 움직임이 있을까? 위에서도 계속 말했지만 지금의 필자 생각으로는 없다. 투입량에 대비해 소량이더라도 어떠한 결과량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참담할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효율성 자체를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추천하진 않지만), 운명을 병적으로 믿는 것이다.

pngwing.com (38).png


참고로 필자는 운명개척론자보다는 운명수용론자에 가깝다. 미래는 예측할 순 없지만, 그 끝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되어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은 철저히 배제한다. 단순히 ‘나는 나중에 무엇이 되어있을 거야’ 정도의 수용론자인 셈이다.



자, 이쯤에서 하나의 가정을 만들어보자. 만약, 정말 만약에 필자처럼 나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믿음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운명'이 펼쳐지는지를 지금 깨달았다고 생각해보자.




예를 들면, 본인이 죽을 전까지 종사할 직종 혹은 업태라든가, 아니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재’를 미리 알아버렸다든가, 혹은 미래의 동반자와 이를 거쳐 간 수많은 남자 친구, 혹은 여자 친구의 얼굴이라든지, 또 내가 어떻게 죽는지를 미리 다 알아버렸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위 친구의 말을 다시 곱씹어보자.




어차피 앞으로의 일을 다 알아버렸는데 당장의 기쁨과 증오, 슬픔과 성취감이 소용있을까?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본인에게 일어났다고 치자. 순간 짜증과 깊은 탄식이 목구멍 단전을 타고 올라오겠지만 이전보다 절실하게 퇴사를 외칠수 있을까? (아, 오히려 막 나갈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방법처럼 운명을 '병적으로' 믿으면 된다. 효율성을 따지지 않아도 되고 순간의 감정도 부질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더 넓은 의미에서 '삶 자체'의 의욕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느끼고 되레 더욱 스트레스만 받을 뿐이다. 공허함이 나를 채우고 눈의 초점은 흐려질 것이며 그저 폐만 수축·이완하는 꼴에 불과할 테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여기 두 가지 옵션이 있다. 나 혹은 타인의 행동에서 배우고 느끼며 불확실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설 것인가,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느끼며 지금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불확실하지만 분명히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아,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이 긴 글마저도 내 소중한 친구의 혼잣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



두서없는 글을 마치면서.



작가의 이전글왜 사서 고생하세요?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