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알아요

by 박홍시

기껏 써놓은 에세이 세이브 분량을 모두 써버렸습니다.

제가 게을러서 매일 글쓰기를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요 며칠 참 쉽지 않은 시기를 보냈습니다.

우울장애가 너무 심해져서 크고 작은 소동이 많았지요.

제 삶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지낸 일주일이었습니다.

높은 곳을 보면 바로 뛰어들어 자유로워지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지요.


그동안 아무 효과 없이 살만 찌는 것 같아 약을 끊었었습니다.

임의로 약을 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돈도 아깝고, 다니는 것도 쪽팔리고, 효과도 별로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약을 끊고 몇 주간은 괜찮았습니다.

역시나 약 효과는 없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기분이 너무 날뛰고 우울은 무겁게 저를 짓누르더니,

끝내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서 다시 병원에 가려고 합니다.


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다니던 병원이 8월 13~16일까지 휴무더라고요.

그 사이에 누가 죽으려면 어쩌려고 저렇게 휴업을 길게 하나 유치한 원망도 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죽거나, 꾸역꾸역 참아서 병원에 가서 약을 먹고 약이 다시 몸에 깃들어 우울감이 조금 줄어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기 밖에 없었습니다.

도망칠 곳이 마땅히 없는 선택지 둘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중에도 일은 해야 하고, 휴학 중이던 학교에 복학은 해야 했으며, 친구들과 약속도 있었습니다.

숨쉬기도 힘들어 죽겠고,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욕구를 항상 억누르는 것도 힘든데 말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일했습니다.

복학 신청도 손끝을 부들부들 떨며 눌렀습니다.

남은 것은 친구와 셋이서 보기로 한 간소한 약속뿐이었습니다.


평소에 잘 연락이 없던 친구가 대뜸 연락이 왔습니다.

집 근처에 유명한 돈가스 집의 분점이 생겼다고 가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친구까지 불러서 셋이서 가자고 약속이 잡혔습니다.

너무 우울했던 나머지 저는 그냥 무작적 알겠다고만 하고 시간과 장소 모두 몰랐습니다.


막상 약속의 시간이 찾아오자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가기 싫었습니다.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고, 제가 좋아하는 메뉴고, 집에서 가깝기까지 한데 말이죠

몸무게가 10배는 된 거처럼 발이 안 떨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약속들을 취소하고, 사죄했습니다.

우울감보다 더 큰 것은 죄책감이었기에 손발을 덜덜 떨며 옷을 입고 밖으로 향했습니다.

날씨는 습하고, 지면은 아지랑이가 종아리를 간지럽혔습니다.


친구들을 만나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무거웠던 인중과 입술이 가벼워지고,

거의 실눈을 뜨고 다녔던 눈꺼풀은 눈썹 바로 아래까지 치솟았습니다.

축 늘어져 나풀거리던 입꼬리도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식욕도 갑자기 왕성해져서는 돈가스를 순식간에 해치웠습니다.

맛이 있고 없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맛있기는 했습니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더운 날씨에 마구 육수를 흘린 저희 셋은 그 길로 피시방으로 향했습니다.

남자 셋이 모여서 달리 할 게 있나요 뭐.

우울함, 공허함, 자괴감, 세상을 떠나고픈 충동에 어쩔 줄 모르던 저는 너무 즐거웠습니다.

어쩐 일인지 웃음도 끝없이 나왔고,

조금 과격한 농담도 서슴없이 흘렸습니다.


올해를 통 틀어서 가장 즐거웠습니다.

아, 즐겁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지.

너무 생생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쇼츠로 떠돌던 오즈의 마법사 같았습니다.

세상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면서 모든 것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 땐 시간이 없어서, 대학교 땐 체력이 없어서 못했던 밤샘 게임을 해버렸습니다.

새벽 4시가 넘도록 이어졌습니다.

친구 한 명은 출근이 목전에 와있는데도 너무 재밌어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원동력은 이런 것이구나 조금이나마 깨달은 밤이었습니다.

다들 이런 경험을 안고, 이런 경험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구나.

그 순간만큼은 우울감이 싹 가셨습니다.

그 여파는 자고 일어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쁘게 아침을 받아들이고, 맛있게 밥을 먹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작고 소중한 경험을 위해 이 인생 전체를 바치고 싶어 졌습니다.

즐거움을 더욱 많이 그리고 자주 느끼고 싶어 졌습니다.

아직 방법은 잘 모릅니다.

그냥 제가 그날 따라 조증이 와서 기분이 좋았던걸 수도 있지요.


하지만 다시 한번 이렇게 재밌게 놀 수 있다면,

기꺼이 지루하고 우울한 일상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인생은 결국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이렇게 소박한 순간에 의해 구해지는 게 아닐까.

저는 그날 밤, 거대한 이유가 아니라 작은 이유로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어두운 날은 또 찾아올 겁니다.

몸이 무겁고, 창문 밖이 유난히 반짝이며 나를 부를 날도 있겠죠.

하지만 이 압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웃었던 밤’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걸.

그 기억은 힘이 다 빠진 내 발목을 잡아당겨서 다시 하루를 걷게 만들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던 그 주에,

나는 내 마음을 살려낸 건 거대한 목표나 기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저 돈가스 한 접시, 친구들과의 농담, 땀에 젖은 셔츠, 새벽까지 울린 웃음소리.

그것만으로도 나는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며 다짐합니다.

그 작은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음에 다시 세상이 흑백으로 바래더라도, 언젠가는 또다시 색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겠다고.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를 살게 하는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르니까요.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7화귀마개로도 막을 수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