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글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는 문장만 보고는 중의성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의미가 한 문장 안에서 소용돌이 친 것이죠.
아 진짜 간단한 문장 같은데?
이러다가 따져보고는 띠옹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죠.
이래 가지고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쓸까 싶고,
막 한국어가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어는 주어도 잘 생략되거나 앞뒤 문맥에 따라서 시제도 대과거를 엄격히 지키지 않는 듯, 상황 맥락을 중시하는 언어니까요. 게다가 관형절에 표지처럼 'that' 등으로 구별해주는 것도 적으니, 그만큼 확률적으로 아차 하면 중의성이 자주 발생하기 쉬운 듯합니다.
사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도 그런 듯합니다.
그의 책에 나온다고 하는데,
이렇게 놓고 보면 큰 이상이 없지만,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중의성이 발생하죠. 우선 첫 번째 의미를 보자면 언뜻
"1) 그러니까 결승선까지 100%로 걷지는 않고 5%는 뛰었다."
같았습니다. 엄청 뛰기 싫은 사람인데 억지로 시늉을 하다가, 결승점에 다다랐을 때 남들 보는 시선도 있고 해서 억지로 뛴 것 같습니다.
인생은 미완성, 왔다가 사라지는...
다쳐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가 하면 "2) 미련하게 끝까지 걷는 행위를 유지하지 않고 중간에 미련을 거두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라는 어감으로도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1)과 엇비슷하지만, 남들이 뛰는 이 세상의 경쟁에서 혼자만 뒤쳐져서 걷기를 고집했는데, 그러다가 그래도, 나름대로 자식을 위해서 발벗고 나서서 엄청 뛰어다니기도 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빠가 적어도 끝까지 게으르게 걷기만 한 건 아니야"라고 변명하는 것 같습니다.
자식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자녀들이 자기를 힐난할 때 무척 섭섭해져서 그리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이 말은 그런 뜻은 아니죠. 바로 세 번째 뜻이겠죠. "3) 힘들어서 뒤쳐져도 100% 뛰기는 했다"는 것이요. 근성 있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내 아무리 비실대게 보여도 너처럼 그러지 않았어 인마! 난,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정말 완주하신 체력 맞나요? 의심스러운데."
이렇게 보면 1)과 2)는 대체로 5%쯤 달린 것이지만, 1)은 달린 게 좀 어쩔 수 없는 최소 방어전 같은 것이고, 2)는 그래도 나름대로 의무를 제대로 하려는 작지만 적극적인 몸부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죠. 그런가 하면 3)에서는 100% 뛰기는 뛴 것이죠. 뜀의 비중이 다르고, 의미가 다르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문장만 하나 떼어놓고 보면 여러 의미가 중첩되지만,
실제로는 그런 오독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건 상황 맥락 때문이죠. 바로 '러너'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뛰는 것이 본질인 정체성을 자신으로 규정했다면 여기서는 끝까지 걷지 않고 뛰기는 했다는 3번의 의미만이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