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친구들 모임에서 오랜 만에 뭉친 종혁과 진웅과 기혁. 셋은 일일 호프를 몰래 빠져나와 자기들만의 일정을 소화하려고 한다. 록카페 해커로 가서 여자들을 꼬드길 계획을 세우는 진웅. 그들은 남자들만의 축제를 준비한다.
♬ 대화
“다음에 또 보자. 잘 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문은 화장실을 나서며 내게 인사했다.
“응. 너도 잘 놀고.”
주머니를 전화기에 꽂아 넣고 어정쩡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자리에 돌아와 보니 진웅과 기혁은 여전히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카페는 어느새 사람들로 붐볐다. 대개는 동창생이었기에 구석 후미진 자리에 앉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녀는 좀 생뚱맞아 보였다. 그들도 잘못 자리를 잡은 사람처럼 시종 두리번거리며 자기들끼리 뭔가 속삭였다. 아마 토요일에 이곳에서 예술영화를 상영한다는 소리만 듣고 온 사람들일 것이다. 마침 오늘 특별행사가 있을 줄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예전과 달리 인기가요가 울려 퍼지는 블루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 틀림없다. 여자는 줄곧 남자에게 속삭였고 그들은 곧 일어섰다. 그들이 떠나는 자리는 옆 테이블 임시의자에 앉아있던 동문들의 차지였다. 태평양의 작은 휴양지 같던 블루는 작전을 앞둔 군(軍) 캠프가 되어있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소리 없이 스크린 위로 흐르는 ‘줄 앤 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안 그러냐? 종훈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응? 뭐 말이야?”
진웅이 갑작스레 묻자 나는 되물었다.
“넌 몰랐겠지만 우리 기혁이가 아다 중의 아다, 생아다잖아.”
진웅의 설명에 나는 다시 물었다.
“생아다라면 키스도 못 해봤다는 그 생아다?”
“키스가 다 뭐야, 뽀뽀도 못 해봤지.”
진웅은 너스레를 떨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기혁이 살짝 발끈했다.
“그럴 수도 있다니? 네가 스머프냐? 기껏 분위기 조성하고 슬쩍 빠져줬더니만 「랄랄랄라라」야. 소풍 가도, 여행 가도 「랄랄랄라라」만 하지? 『스머프』에도 에로스머프를 내보내야 한다니까. 애들이 보고 배우는 게 있어야지. 동화 속 주인공도 최소한 키스는 한다.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백설공주 같은 거 읽어봐. 다 키스는 한다고.”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탁자에 놓인 레드락 뚜껑을 열고 88을 집어 입에 물었다.
“그래서 내가 베푸는 마음으로 두 달 전에 기혁이와 나이트를 갔거든.”
“그런데?”
88을 깊게 빨자 독한 기운이 폐 속으로 맹렬히 빨려 들어왔다.
“기껏 작업해서 다 떠먹여 줬더니만, 뱉어내는 거야. 2차 나가자마자 헤어진 거지. 내가 뭐 많은 걸 하라고 했냐? 네가 여자랑 '원나잇' 하는 건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어. 그냥 키스만 어떻게 해보라고 그렇게 돈 쓰는 친구가 어디 있냐? 그때 얼마를 썼는데. 땅 파면 돈 나오는 줄 아는지, 원.”
“미안해.”
기혁이 멋쩍어하면서 허허 웃었다.
“야, 이거 독한데. 근데 말보로랑은 좀 달라.”
나는 다시 연기를 빨았다.
“그치, 독하지? 근데 멕시칸소스 같아. 맵지만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게.”
기혁이 말했다.
“그럼 말보로는?”
“제대로 얼얼하지. 청양고추처럼.”
“얼마나 피웠다고 벌써 박사 된 거냐?”
나와 기혁의 얘기를 듣던 진웅이 훗훗 웃으며 되물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맥주를 홀짝였다. 조금 얼얼한 기분이었다.
“사실은 나도 아직 총각인데.”
“오 마이 갓!”
진웅은 분명 빠르게 이어 발음했다.
“이거 안 되겠구먼. 결국 여기서도 킹사노바님의 족집게 강의를 열어야 하는 것인가?”
진웅은 호들갑을 떨었다.
“생아다는 아냐. 진하게 키스는 해봤다고.”
주희와의 첫 키스를 떠올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안주 더 시키자.”
기혁이 포크에 돈가스 소스를 묻히며 빈 접시를 가리켰다.
“지금 안주가 문제야? 내 말 좀 들어보란 말이야.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고.”
“알았어.”
기혁이 소스를 핥으며 답했다.
“지금 두 영혼이 빛을 보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데 이 킹사노바님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특히 종훈! 넌 곧 군대 가는데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총각 딱지를 떼고 가야 할 거 아냐? 군대에 대한 예의가 있지, 안 그래?”
“난 미아리 같은 데는 싫어.”
“누가 거기 가자고 했냐? 나도 거긴 싫어. 허무하잖아.”
“그럼 나이트?”
“그래! 넌 빨리 접수하는구나.”
진웅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권총 쏘는 시늉을 했다.
“가지 말자. 나이트.”
기혁이 정색했다.
“그래, 가지 말자. 돈도 없고 동창회 와서 무슨 나이트냐.”
기혁과 내 말에 진웅은 슝 날아가던 총알이 하늘 위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슨 소리?”
진웅의 즉각적인 되물음에,
“돈도 없고 가더라도 결과가 뻔한 걸…….”
기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 노력하면 돼. 넌 할 수 있다고, 뽀뽀.”
진웅이 힘주어 말했다.
“내가 나이트 쏠게. 대신 기혁이는 2차 책임지고 성공해. 이건 임무다.”
“아…… 알았어.”
“그리고 종훈인 이번만 특별히 내가 2차까지 대준다. 호텔비.”
“어, 진짜?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돈 빼면 시체지. 우리 어르신이 다른 건 몰라도 돈은 꼬박꼬박 공급해주거든.”
진웅이 지갑을 열어 카드를 여러 장 내밀며 웃었다. 그러고는 잠시 서빙 하느라 바쁜 수현 쪽을 살폈다.
“대신 은인인 날 잊으면 안 돼. 연락 좀 하고 살자. 알간?”
진웅이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알았다.”
나는 웃으며 맥주병을 들이밀었다.
“그럼 가는 거다. 응?”
“안주나 더 시키자. 응?”
기혁이 안주 얘기를 꺼내자마자 진웅이 바로 반응했다.
“어휴, 진짜 왜 그러냐? 기혁아. 모험을 즐겨봐. 맨날 카페에서 술이나 홀짝거리지 말고.”
“난 그냥 좀 어색해서.”
“걱정하지 마. 그냥 오늘은 즐기러 가는 거야. 오늘의 주인공은 종훈이니?”
“그럼, 그럴까? 양주 먹는 건 뭐 나쁘지는 않지.”
기혁이 포크를 내려놓는다.
“그래, 그러자고. 이 근처엔 나이트 변변한 게 없으니 그냥 록카페로 가자. 해커 어때?”
“해커?”
“응, 해커. 이 근처에선 제일 물 좋은 데야.”
진웅이 적극 제안했다.
“아무래도 그런 분위기는 적응이 잘 안 되는데…….”
기혁은 여전히 망설였다.
“그만! 기혁아, 좀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 봐. 너 만하면 충분히 경쟁력 있다고.”
진웅이 기혁을 열심히 추켜세웠다.
“그런가?”
“그렇지! 용기를 가져. 이번 기회에 너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지. 오케이?”
“그래, 오케이.”
뜸을 들이던 기혁이 진웅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였다. 이제 진웅은 나를 쳐다본다.
“넌?”
“해커라고 했지?”
“그래, 해커.”
“가보자. 분위기 바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좋아! 그럼 마지막 건배하고 일어서자고. 여긴 지금 사람이 너무 많다고.”
건배!
♬ 킹사노바 가라사대
“킹사노바 가라사대, 모든 나이트나 록카페에는 죽순이들이 있다. 그 죽순이를 가려내는 일은 오랜 노하우를 지닌 프로들이 하는 것이고, 너희 같은 초보들은 그냥 내가 선정하면 그 대상에게 성심을 다하면 된다. 그때 중요한 건 마음에 드는, 즉 예쁜 여자에게 너무 친절하게 집적대지 말라는 거야. 그러면 꼭 못생긴 애들이 옆에서 훼방을 놔. 그러면 어떻게 되겠냐? 파토지. 그러니까, (어쩌고저쩌고.)”
어딜 가느냐는 수현의 물음에 대충 둘러대고 우리는 블루를 빠져 나와 걸었다. 진웅은 신이 났는지 큰길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걸으며 시종 장광설이다. 기혁은 옆에서 그가 킹사노바인 이유를 덧붙였다. 원래는 연극영화과 친구들과 몰려다닌 진웅은 그 무리에서 김씨 카사노바, 줄여서 김사노바로 불렸고, 같은 성씨를 지닌 다른 친구와 구별하기 위해 킴사노바로 불렸단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탁월하게 여자를 꼬신다고 해서 존경의 의미로 킹사노바가 되었다나, 어쨌대나.
그러니까 나는 지금 킹사노바의 비싼 강의를 듣는 셈이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우선, 해커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물을 살핀다. 이땐 간단하게 맥주를 주문한다.
둘째, 물이 좋으면 본격적으로 목표대상을 좁힌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오늘은 총각 딱지를 떼려는 게 목적이므로 가장 잘 놀 것 같은 애들을 선택한다. 이건 킹사노바의 몫이다.
“야, 너 왜 자꾸 긁냐? 목을 그렇게 긁으면 피나서 전사하겠다.”
진웅이 열변을 토하다가 내 모습이 거슬렸는지 결국 한마디 했다. 나는 그제야 손이 목에 가있는 걸 알아차리고 바지 주머니에 엄지손가락을 꾹 찔러 넣었다.
“아, 술만 마시면 이래. 이상해. 신경 쓰면 가렵지 않은데, 아차, 실수해서 긁기 시작하면 아주 난리 나지.”
“이런, 그럼 어쩐다. 작업 들어가서도 긁어대면.”
“걱정 마. 신경 쓰면 곧 괜찮아져.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 체질이 바뀌는 건지 한동안 심했는데 요새는 정도가 많이 나아졌어.”
“어쨌든 신경 써. 긁다가 여자들 죄다 도망가게 하지 말고. 호텔 가서 알몸인 채 박박 긁어봐. 아주 웃길 거야.”
“비듬도 떨어지고?”
기혁은 한술 더 떴다.
“그래, 비듬도 떨어지고.”
진웅은 기혁을 보며,
“그래, 그렇게 받아치는 거야. 그렇게만 하면 돼. 오늘 물올랐어. 기혁.”
우리는 우주가 예전에 자주 애용하던 공중전화부스를 지났다. 다시 진웅은 강의를 진행했다.
셋째, 킹사노바가 여자들을 꼬셔서 우리 자리로 데려온다.
“우선 이야기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꺼내야 해. 가자마자 「저, 저희가 이쪽 분들 마음에 드는데, 합석하시겠어요?」 따위 아주 쥐약이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진웅은 ‘자연스럽게’를 부자연스럽게 강조했다. 목소리와 손놀림이 좀 과장된 그였다.
한적한 거리를 빠져나오자 인파와 차들의 소음에 매미 소리마저 묻혔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뛰자!”
진웅과 기혁이 잽싸게 달린다. 나도 따라 달렸다. 댄스음악이 길가에서 들렸다. 뮤직랜드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해커가 있는 블록으로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 있는 동안 진웅의 강의가 이어졌다.
넷째, 여자들을 데려오면 공략 대상을 대강이라도 정해 놓아야 한다. 모두 퀸카고, 각자 마음에 드는 대상이 다르면 좋겠지만 대개 그런 경우는 드물다. 결국 폭탄제거반과 작업반으로 나누어 행동해야 효과적이다. 폭탄제거반은 여자 쪽에서 못생긴 애들과 엮여야 한다. 또한 작업반을 돋보이게 해줌으로써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게 하는, 말하자면 윤활유 같은 존재들이다.
“오늘은 그 신성한 일을 내가 해내야 하는 거지. 초반 옥석 고르기 작업부터 후반 폭탄 제거 임무까지 모두 내 몫이라고! 주작업맨은 김종훈, 부작업맨은 송기혁!”
진웅은 자못 비장하게 자신의 임무를 말하더니 권투경기장 내 아나운서처럼 우리를 소개하는 시늉을 했다.
이런 진웅을 보고 사람들이 흘끔거린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쉴 새 없이 떠드는 진웅이었다.
“여자가 확실히 2차 갈 것 같으면 중간에 내가 양주를 주문할게. 그러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자는 신호고 양주를 주문하지 않으면 아닌 거야. 계집애들이 시키자고 졸라도 절대 넘어가면 안 돼. 특히 종훈이 너.”
“나?”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다.
“일단 건너자.”
길을 건넜다. 길옆에는 더운 여름밤에 떡볶이와 오뎅을 파는 포장마차가 눈에 띄었다.
‘후, 진짜 덥겠다.’
등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땀방울이 주르륵 떨어져 허리띠 근처에서 멈췄다. 기혁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냈다. 진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섰다. 해커 앞에는 양복을 차려 입은 삐끼들이 손님 몰이를 하고 있었다.
“세 명이요.”
진웅이 능숙하게 말했다.
“손님 세 분 들어가십니다!”
무전기에 대고 힘차게 말하는 삐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