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를 다시 보다 / 허기 / 최악이야!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종훈은 주희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뒤 실연의 아픔으로 방황한다. 그리고 그 이별에는 자신이 일말이라도 바라던 안타까운 사연 같은 건 없었다. 결국 분노에 휩싸이지만, 자신이 어쩔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 뿐. 하지만 당시로써는 능숙할 수 없었으므로, 가출도 했다. 주유소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버지 문제도 얽혀 있었던 것일까?)






♬ 블루를 다시 보다

기운을 차리자며 그날도 아침부터 비디오가게를 찾았고 그동안 절대 눈에 띄지 않던 블루를 구작코너에서 발견했다.


줄리는 남편의 정부(情婦)에게 집을 제공하겠다고 말했고 정부는 “정말 그분 말대로 사모님은 천사 같은 분이시군요.”라고 답했다. 줄리는 순간적으로 인간적인 분노를 표정에 드러낸다.

하지만 네이팜데스의 과격한 목소리와 어울릴 법한 혼란스러운 심연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블루에서 장중한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반면 내 귓가엔 매미 소리가 강렬한 기타 소리처럼 들려왔다. 징징징.

아침 창가에 햇볕이 무너지고 먼지가 이리저리 날렸다. 밝음이 어둠을 밀어내는 치열한 전장에서 희부연 먼지가 날렸다.

블루의 우아함은 잡스러운 기운에 이미 무너졌다. 주인공의 번뇌는 내 우스꽝스러운 꼬락서니와 대비됐다. 구겨진 잠옷과 폭탄 머리, 눈곱 그리고 눈물. ‘주르륵’도 아니고, ‘쪼르륵’ 흘렸다.

아, 지지리 궁상.

난들 왜 멋진 자세로 어두운 방 안에서 파란 불빛이 산란하는 슬픔을 살피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타고난 소박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블루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창가에서 눈물을 흘리는 줄리 때문에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다시 우울해져 아무 생각을 안 하기 위해 잤던 것 같다.

‘블루에 물들었구나.’

낮잠을 깨서도 계속 우울했다. 허, 전, 함.

아침의 각오는 온데간데없었다.





♬ 허기

낮잠을 깼는데도 우울했다. 나는 집을 나선다. 발길은 정처 없다. 영화관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백화점을 기웃거렸다. 아무래도 정처 없다. 노력해도 정처 없다. 결국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간다, 습관을 따라 주희의 집으로 향했다.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주희를 볼 수는 없었다. 주희를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죽치고 있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배가 고팠다.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매번 허기에 굴복했다.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비굴함은 살아가는 힘이었다.





♬ 최악이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가정한 여러 상황 중 최악이었다. 주희가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이야. 그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된다는 무력감에 눈물을 쏟을 뻔했다. ‘소심한 인간’이라고 자책하며 길을 돌아내려 오는데 주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알았을 테니 그만 단념해.”라고 차갑고 간단하게 말했다.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희네 집 앞으로 달려가 따끔하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 했으나, 결국 주희네를 지나쳐 곧장 길 위로 달렸다. 공터를 향해.

새벽마다 주민들이 올라와 운동을 하는 다른 공터와 마찬가지로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철봉, 평행봉과 같은 운동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어두운 공터에서 초라하게 서서 목 터져라 외쳤다. 육두문자로 시작한 말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면서 나도 몰랐던 기발한 단어들을 척척 조합하며 욕의 요지경을 펼쳐 보였다. 모든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아래로 반짝이는 건물 불빛을 바라보며 청승을 떨었다.

하지만 그 청승도 오래가진 못했다.

“꼬마야, 좋은 말로 할 때 주둥이 지퍼로 채워라. 땅바닥에 발라버리기 전에.”

굵은 남자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고 호전적이어서 나는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철봉에 매달린 남자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삭발, 매서운 눈매, 잘 다져진 근육 그리고 근육에 착 달라붙은 화려한 문신. 갑자기 객사한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의 경우가 내 뇌리를 스쳤다.

나는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조용히 공터를 빠져나왔다. 나는 살벌한 공격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천성적 소심함에 감사했다. 주희네로부터 반대편으로 뻗은 내리막길을 내려오면서, 바람에 쓸려갔던 서글픔이 다시금 소심함을 밀어내고는 내 머리에 들어찼다. 왠지 나 자신이 한심하고 서글펐다.

‘그렇다고 정중하게 인사할 것까진 뭐람.’

자책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무서운 사내가 따라오지는 않을까 힐끔 뒤를 돌아보기는 했다.

나는 평지로 내려와 도심에서 뿜어대는 네온사인을 보고서야 안심했다. 차 소리가 여과 없이 들렸다. 그 소음들이 날카로워서 귀가 먹먹했다. 나의 초라한 무기력함은 자꾸 가슴 한편에서 들썩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터벅터벅 걸었다. 주머니에서 지폐와 동전이 만져졌다. 돈을 꺼내 세어보니 ‘잠잘 곳만 해결되면 내일 오후까지는 문제없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멀찌감치 보이는 병원간판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 가출하면 병원응급실에서 자는 게 좋다는 진웅의 말이 떠올랐다. 삐삐를 꺼내 살피니 벌써 11시 40분. 집에서 호출이 두 번 남겨져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삐삐를 껐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무작정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집 반대방향으로 운행하는 버스를 탔다. 처음엔 승객들의 시선 때문에 머리가 신경 쓰였지만 곧 개의치 않고 눈을 감고 졸았다.

한참 후 눈을 떴을 때 승객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도심지와 달리 주변 건물들이 듬성듬성 있었고 층수도 낮았다. 이때 내 눈에 맞은 편 주유소 건물이 들어왔다. 병원이 좋다고 권장하던 진웅이 주유소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괜찮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버스에서 내려 주유소로 들어갔다. 다행히 주유소에선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중이었다. ‘숙식제공, 남자우대.’ 다른 요구조건은 없었다.

한 달 뒤, 엄마는 나를 찾아냈다. 단 한 녀석에게만 알려줬는데 그 녀석이 엄마에게 정보를 알려준 것이었다. 변명하기론 우리 집이 내 실종기간 동안 너무 심각한 분위기여서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난 그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친구에게만은 말했고 일부러 가장 입이 싼 친구에게 귀띔했을 것이다.

주유소 사장과 대화를 마치고 나온 엄마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혼날 각오가 돼 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아, 꼭 고슴도치 같다.”

엄마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멋쩍게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나의 손을 잡고는 차도 쪽으로 가서 택시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손아귀 힘이 그렇게 센지 그때 처음 알았다.


한 달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라면 주희는 가고 담배가 왔다는 것이다. 말보로 레드. 매운 연기에 익숙해지자 나는 기운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맹렬히 밀려드는 매미 소리에 파묻힌 채 우울함을 뒤집어쓰고 맞이하는 결심이었다.

‘대학 가야지.’

번쩍 정신이 들었던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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