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땐 그랬지 / 이주희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피신하듯 부산 외가의 신세를 진다. 아버지의 불륜은 아직 자세히 언급되진 않는다. 그보다는 부산에서 첫 사랑으로 여기던 이주희와의 만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첫 키스의 느낌도.





♬ 그래 그땐 그랬지

“우주 얘기는 그만하자. 우주, 귀 간지럽겠다. 사는 이야기 좀 해봐라. 넌 왜 연락 갑자기 끊었냐? 그때 얼마나 섭섭했다고.”

진웅이 내게 물었다.

“아, 그거. 그래 그땐 그랬지.”

나는 얼버무렸다.

“재수하면서 연락하면 어디 덧나냐? 하기야 마음고생이란 거 안 해보면 모른다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그땐 그랬다.

입시실패도, 아버지의 불륜도, 첫사랑 주희의 이별통보도 어느 하나 나에게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악재가 겹치면서 나는 점점 내성적으로 변했다. 그런 중에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처음 부산에 내려갔을 때만 해도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예상하진 못했다. 두 분 이모들이 결혼하여 출가하고, 전직 공무원이셨던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와 단둘이 38평 아파트에 살고 있었으니, 우리 모자가 신세 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피신에 가까운 이사였지만 곧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너무도 당연하게 믿고 있었다.

나는 잠시 즐거운 게임을 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무료한 일상을 달래주기 위해 사서 고생하는 게임.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희소식을 들고 찾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그때 유일한 구세주는 아버지뿐이었다.

하지만 6개월이 넘어도 아버지는 곧 해결할 수 있다는 공허한 소식만을 보내올 뿐이었다. 그때 비로소 서울에서 쫓겨났다는 걸 실감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방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외형적으로 좀 좁아졌다뿐이지 큰 변화는 없었으니까.

‘뭐, 이쯤이야.’

곧 아버지가 일을 해결할 거라고 믿으려 했다. 그것 외에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때 엄마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름대로 부산생활에 점점 익숙해졌다.





♬ 이주희

‘이주희.’

어쩌면 그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산 생활이 그래도 재미있었던 것은 첫사랑이라고 믿는 그녀와의 인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뭐, 첫사랑이 어떤 거냐고 묻는다면 저마다 그 의미와 범위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여자 친구로 사귀었고 첫 키스를 그녀와 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고2 겨울방학 강좌로 신설된 종합반에서 주희를 처음 봤다. 그녀는 붉은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첫마디는 “옆에 자리 있어요?”였다. 깜찍한 목소리,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큰 눈을 지닌 단발머리의 주희는 그렇게 다가왔다.

설렘, 촉촉함.

그녀를 본 첫 느낌이었다. 그건 공부에만 방해되었을 뿐 결코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도 신경 쓰여 잔뜩 긴장한 내 모습을 지금 되짚어보면 정말 웃음만 난다.

그 첫 느낌 불편하면서도 꽤 설렜다.

주춤거림, 움츠러듦.

사랑한다고, 사귀자고 고백하던 때 나는 실연의 경우를 수없이 대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여차하면 심연의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했었다. 의외로 간단히 그녀의 허락이 떨어졌을 때 난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질렀었다.

앗싸!
라고 외쳤던 것 같다, 채신머리없이.


우리는 평범한 고딩 연인이었다. 엄마 몰래 학원 땡땡이치고, 주희와 함께 공원이나 극장으로 놀러 다녔다. 철없어서 행복했다. 아직은 어려서 대개의 경험이 진부한 경우보다는 새로운 경우가 많았다. 고3, 1학기는 설레고 촉촉했으며 주춤거리고 움츠러들기도 했다.

다만 막연히 생각하던 내게 첫키스의 느낌은 생각처럼 황홀하진 않았다. 그녀의 집 앞에서 꾸물거리며 살짝 입맞춤을 했더니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면서 주희는 진한 키스를 다시 시도했다.

타인의 일부가 쑥, 들어온 사건.

타액의 느낌은 타인의 느낌이었다.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내 혀는 초보의 그것이었다.

주춤거림, 움츠러듦.

미처 설렘, 촉촉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키스가 끝나고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에 긴 울림이 남았지만 정말이지 너무 어설펐다. 그때야 비로소 홀린 것처럼 설레고 촉촉했으며 되새기다가 쑥스러워서 주춤거리고 움츠러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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