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목차: 에어픽션-방백의 놀이]
♬ 독백과 대화 사이
♬ 대화, 독백, 방백은 연극의 요소다
♬ 일상생활에서 방백의 양상
♬ 이것도 방백이다
♬ 연예인이 방백을 한다면
♬ 지인끼리 온라인에서 쓰는 암호
♬ 복화술
♬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방백의 기초적 유형
♬ 오프라인 방백의 예1
♬ 오프라인 방백의 예2
♬ 온라인 방백
♬ 개인 간의 온라인 방백
♬ 방백의 존재를 깨닫다
♬ 미친 우연
♬ 놀랍도록 기막힌 우연
♬ 방백의 덫
♬ 방백의 놀이
♬ 방백의 유통을 엄밀하게 증명하지 않아도
[소개글]
- 이 내용은 사실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을 분류하던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4년 전쯤으로 실제로 핵심적으로 짧은 내용은 <웹 시대의 지성>에 덧글처럼 넣었는데, (생략) 이제 이런 유형의 소통은 트위터와 같은 데서는 일상이 되었고, (생략) 기대와는 달리, 이 소통 유형을 정교하게 서술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미신적으로, 부정확하게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생략) 그 과정에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것도 있었고, 거쳤기 때문에 배운 것도 있었다. (더보기)
♬ 온라인 방백
자주 언급했듯이, 방백의 잠재적인 기능을 폭넓게 선보이는 데가 인터넷이다. 그곳에서는 일반적인 방백의 유형 모두를 포함하고도 또 다른 특성이 엿보인다. 예컨대 아직 보내지 못한 편지가 있다고 가정하자. 만일 그 편지글을 오프라인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글의 내용은 독백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블로그에 공개 저장 한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이때 공개로 해놓은 편지글은 ‘불특정 다수가 읽을 수도 있는’ 방백으로 기능한다. 또한 그 글에는 다른 바람이 담길 수도 있다. 이제 올린 이는 ‘내가 쓴 글을 원하는 그 사람이 읽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지닐 수 있다. 인터넷의 망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영원히 독백으로 묻히거나 애초에 희박한 가능성 때문에 쓰지 않았을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을 인터넷에서 얻은 셈이다.
물론 방문객수가 적은 블로거라면 그 편지글을 몇몇만이 읽을 것이다. 어쩌면 대충 훑다가 원하는 자료가 아니라 여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릴 수도 있다. 이때 이 편지글은 독백에 가깝다. ‘대화에 실패하여 독백이나 다름없어진’ 방백이라고 표현해보면 어떨까?
그럼에도 역시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오프라인이라면 그는 그 편지글을 실제로 동봉해서 짝사랑하는 이에게 보낼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는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당사자가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자기와 관련된 이 편지글을 볼 수도 있다. 그때 독백이었든 방백이었든 대화로 전환된다. 자료를 삭제하거나 비공개처리하지 않는 한 여전히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 아주 오래도록 그 자료는 낡지 않고 인터넷에 남아있을 것이다. 최근 분위기에 맞춘다면 이 역시 낯선 스토커의 무례하거나 위험스러운 글로 전락할 수 있지만, 여전히 연예인 등과 같은 이들에게는 일반적으로 팬레터로 기능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공인에게도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예컨대 연예인의 경우 과거에는 소문에 대해 자기 귀만 막으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소문이 사라져버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자료들은 인터넷에 남아있다. 디지털 시대의 '잊힐 권리' 역시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한 공인의 과거사를 인터넷에서 상세히 알 수 있다. 지금 어린 아이들이 자라서 해당 연예인의 스캔들을 알고 싶을 때도 여전히 그 자료가 인터넷에 남아있을 수도 있다. 가끔 자식에게 말하기 싫은 일들도 있을 것이다. 그 감추고 싶은 비밀, 혹은 굳이 알려지고 싶지 않은 사안을 언젠가 자식들이 알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말하자면 방백에는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담겨있다.
그런가하면 무심함도 묻어있다. 카페의 공지사항을 예로 들겠다. 그것은 제한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일일이 정을 담아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공식적이고 무표정하다. 대개 문체는 간결하다. 많은 사람이 효율적으로 읽는 것을 의도하기 때문에 일시나 장소 등을 눈에 띄게 표기하고 문장을 짧게 끊어낸다. 때때로 법을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다. “이 공지사항을 무단 복제하여 사용하면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식의 문장 역시 그것을 담고 있다. 여러 관계가 겹치므로, 공적인 언어는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필요한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공적이고 건조하게 다가간다. 상관 없는 사람이더라도 한번쯤은 위반 사항을 더 면밀히 읽고 만다.
물론 대개 일반적으로 개인의 온라인 방백과 독백은 책임을 요구받지 않는다. 혼자서 블로그에 뭘 하겠다고 잔뜩 써놓았다고 해서, 정말 그걸 지키는지 감시할 사람도 없다. 지키지 않을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벌을 주겠다고 할 사람도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서 벌칙을 언급할 경우, 우리는 자신이 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거나, 사적인 발언에 대한 책임은 과하다며 규칙을 수용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그것을 수용하며 약속의 이행을 다짐한다면, 그때 우리는 지켜야 할 의무감을 비로소 얻는다. 누군가 블로그의 방백을 대화로 전환한 뒤, 구체적인 책임과 권리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그것에 합의하든 합의하지 않든 둘의 문제다.
흔히 책임감을 부여받지 못한 말들은 독백과 방백 사이에 갇힌다. 온라인의 많은 발언이 그 틈새에 갇힌다. 독백에 갇히면 말은 외로움에 소외되고, 방백에 갇히면 ‘관계를 실패한다’는 두려움에 소외된다.
나 역시 ‘독’백과 ‘방’백 사이에 갇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독방’에 갇힌 셈이다. 한번은 한 블로거를 다른 인물로 착각하여 오해했었다. 그리고 다른 경우는 방백의 놀이를 하다가 그만 실제로 대화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발생했다. 대개 인터넷 속의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사이”고 “모르면서도 아는 사이”다. K라는 블로거의 말이다.
그걸 인정하고 방백을 활용할 때 그 말법은 매우 풍성한 열매를 우리에게 준다. 그러나 만일 어느 순간 방백이 아니라 실제로 대화하고 싶다면 변화가 일어났다면, ‘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소통을 갈망하며 방백의 규칙을 깨려할 것이다. 더 가까워지길 원할 때 균열이 생긴다.
그런데 “알면서도 모르는 사이”고 “모르면서도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선뜻 알은 체 하기도 난감하고, 대놓고 모른다고 하기에는 박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모른 척하는 편이 각자에게 나은 경우가 많다. 세상의 관계는 차고 넘친다. 또한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자신의 사적인 경험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설령 상대에게 호감이 있더라도 딱히 그걸 드러내기에 생뚱맞은 상황도 있다. 그때 우리는 자주, 온라인 관계의 발전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알면서도 모르는 사이”는 대개 방어적이거나 소극적이다. 인터넷의 관계다.
그러나 사실 대화는 독방에서 멀리 있지 않다. 면회실로 가면 되는데, 다만 간수가 자신이 죄수의 면회를 허용한다는 서명을 해야 한다. 그와의 면회를 신청한 사람 역시 자신이 와서 “면회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서명하여 인정한다. 명기된 이름은 책임과 관련된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온라인의 방백이 아주 불량하게 보일 수 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정보와 관계가 흘러오는 바람에 생기는 한계라고 할 수도 있다. 과거 시골의 사람들이 서로 깊은 데까지 아는 것과 달리, 도시인들의 경우 다양한 인간 관계를 일일이 챙기다가는 수용력에 한계가 오고 만다. 그래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에 관한 기능을 잠정적으로 꺼두는 것은 아닐까. 악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사실 온라인의 많은 소통 유형은 방백이다. 그리고 그 방백은 수많은 정보 공유에 유용하다. 방백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관계의 마지막 열쇠가 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과 말하기 위해 더없이 좋은 방식이다.
그러다 몇몇을 다른 방식으로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게 방백을 넘어 진짜 상대와 말하길 원하면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고 했다. 대화를 원하면서 긍정적인 가능성도 열리기도 하고, 알면서 모르는 사이라는 것에 인터넷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