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목차: 에어픽션-방백의 놀이]
♬ 독백과 대화 사이
♬ 대화, 독백, 방백은 연극의 요소다
♬ 일상생활에서 방백의 양상
♬ 이것도 방백이다
♬ 연예인이 방백을 한다면
♬ 지인끼리 온라인에서 쓰는 암호
♬ 복화술
♬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방백의 기초적 유형
♬ 오프라인 방백의 예1
♬ 오프라인 방백의 예2
♬ 온라인 방백
♬ 개인 간의 온라인 방백
♬ 방백의 존재를 깨닫다
♬ 미친 우연
♬ 놀랍도록 기막힌 우연
♬ 방백의 덫
♬ 방백의 놀이
♬ 방백의 유통을 엄밀하게 증명하지 않아도
[소개글]
- 이 내용은 사실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을 분류하던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4년 전쯤으로 실제로 핵심적으로 짧은 내용은 <웹 시대의 지성>에 덧글처럼 넣었는데, (생략) 이제 이런 유형의 소통은 트위터와 같은 데서는 일상이 되었고, (생략) 기대와는 달리, 이 소통 유형을 정교하게 서술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미신적으로, 부정확하게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생략) 그 과정에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것도 있었고, 거쳤기 때문에 배운 것도 있었다. (더보기)
♬ 복화술
시인 김선재는 복화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는 대개 복화술의 형식을 빌린다. 그건 산 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화술의 문장은 최초이며 최후인 단어들의 조합이다.”
또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를 봐도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너는 혼자다. 너는 홀로인 사람처럼 걷는 법을, 한가로이 산책하는 법을, 주시하지 않고 바라보는 법을, 바라보지 않고 주시하는 법을 배운다. 너는 투명성을, 부동성을, 존재하지 않기를 배운다. 너는 하나의 그림자가 되는 법과 마치 돌멩이라도 된다는 듯 사람들을 쳐다보는 법을 배운다.』
이 역시 복화술의 소통 방식과 흡사하다. 이런 소통 방식은 기괴한 것이 결코 아니다.
복화술은 방백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상에서 너무 흔하게 쓰인다. 물론 엄밀한 의미로 입을 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일상에서 보기는 어렵다. 복화술을 재미로 하는 게 아니라면 뭔가 특수한 상황에서 복화술을 쓴다. 기본적으로 남의 시선이 많지 않고 둘만의 대화가 가능하다면 복화술을 쓸 가능성은 낮다. 즉 복화술을 쓰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모든 시선이 복화술을 하는 사람에게 꽂혀 있지만, 정작 복화술을 하는 사람은 대화를 하려는 사람과 둘이서만 소통하고 싶은 경우다. 그때 남들이 보기엔 입모양이 변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옆 사람과 그는 복화술로 입모양을 움직이지 않은 채 대화를 하기도 한다. 이때 복화술은 방백으로 유통되지 않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자 하는 방백인 셈이다.
그런데 복화술을 잘 못 쓰면, 발음이 뭉개져 대화에도 실패할 때가 있다. 직설적으로 복화술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도 다른 말로 빗대어 겉으로 드러난 말과는 다른 의미를 상대에게 전달하며 눈치를 주곤 한다. 그리고 실패의 확률도 많다. 이때 수용자가 상사의 눈치주기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소통은 실패한다. 눈치 없는 사람 된다.
이면적인 대화의 실패다. 이때 혼나고 있던 과장 옆에 있던 말단 사원이 부장의 말 돌리는 습관을 알고는 이면을 해석해낸다면, 그래서 알아서 눈치를 본다면, 과장 옆에서 경청하는 사원들에게는 부장의 이면적인 대화가 방백으로 기능한 셈이다. 어쩌면 부장은 그러한 방백의 효과를 기대한 것일 수도 있다. 부장은 누구에게도 관련된 명확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아서 그의 의도를 해석해낸 셈이다. 복화술처럼 아무런 입모양도 잡히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방백으로 그 말을 들었던 것이다. 부장은 직접적인 압박을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효과를 거둔다. 그 언급을 안 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빗대어 교묘히 책임을 피하려는 태도와 관련된다.
요즘 온라인을 보면 복화술과 매우 흡사한 소통 유형이 많다. 대표적으로 트위터의 리트윗을 들 수 있다. 오상진 아나운서의 리트윗이 과거 문제가 된 것도 (근거가 충분치 않더라도) 복화술로 해석하려는 심리가 작용했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의 트위터를 구경하던 사람들에게서 방백의 행위로 해석된 것이다. 이처럼 방백은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발생하고 그 소통 간에 무수한 오해의 틈이 있다. 그러므로 그 해석에서 늘 거리를 둘 때 방백은 풍부한 의미를 추출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단정적으로 해석하는 순간 심각한 오류가 생긴다.
여자들이 남자친구에게 넌지시 자신의 속마음을 알리는 표현 방식이나, 직접 맞붙는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선호된다. 과거 미니홈피 배경음악이나 휴대폰의 컬러링에도 그러한 기능을 담을 수 있다. 누군가를 향하여 대화를 시도하지만, 방향이 불확실한 매체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방백을 감수하는 사례다. 마치 시선을 의식해 입을 벌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말하는 것처럼,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복화술의 경우 문학적 치환능력과 알맞은 자료를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활용도가 높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유명한 시조 읊기 사례처럼 문학적 수사, 특히 알레고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와는 다른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 역할을 해준다.
이때 빗대는 내용이 많을수록 점점 암호화되는 소통이 되므로, 단발적으로 끝내는 편이 오류를 낳지 않아 좋다. 아니면 명확하고 객관적인 말로 바꾸어 보아도 좋다. 후자는 오류를 줄이려는 태도면서 넘겨 짚어서 생길 멋쩍은 상황도 현명하게 피해가는 것이겠다. 그렇다고 쓸데없이 말하지 않아도 될 치명적인 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
반대로 그러한 모호한 해석을 끄집어낸 뒤 팩트 체크를 하면서, 작은 염려마저 공론화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그 복화술이 공적인 성격을 띨수록 알 권리를 위해 그런 시도를 한다. 그렇다.
공공기관에서도 복화술의 의미는 스며 있다. 언론, 방송에서도 자주 쓰인다. 용어의 표현만 다를 뿐이다. 흔히 미디어 기호학자들이 이에 관해 탐구한다. 예를 들어 정조와 조광조라는 인물이 유독 노출빈도가 높아진 것과 노무현대통령의 관계를 찾거나, 박근혜대통령과 선덕여왕 등의 관계를 찾는 것도 일종의 공적인 복화술 탐구겠다. 9시 메인 뉴스나 신문의 1면에 특정 인물의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노출시켰는가 비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공기관이나 언론에서 복화술적으로 말하고 싶은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검토하는 작업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