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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Jan 23. 2024

주방을 발음하다

산문

단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착각하거나 발음하기 편한 대로 그저 불리는 때가 있다. 책상을 의자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원희라는 이름을 사람들은 자주 희원이로 착각하였다. 아마도 ‘이’라는 성과 ‘희’라는 이름의 끝자리가 유사한 발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들 사이에 희원과 유사하거나 같은 이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꾸로 해도 이효리는 이효리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발음상 리효이가 되어야 한다. 북한사람이라면 리효리일 테니 거꾸로 해도 리효리가 맞다. 그러므로 역시 그 바닥의 최고 갑은 ‘이남이’일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남이를 거꾸로 하면 정확히 이남이가 될 것임을 안다. 북한사람에게는 다르다. 리남이일 테니 거꾸로 하면 이남리가 된다.

 

▪ 키친과 치킨 사이

키친과 치킨의 관계도 엇비슷하다. 나는 한때 자꾸만 이 두 단어를 헷갈렸다. 키친을 치킨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내가 치킨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일까? 지금은 그쯤은 아니지만 한때는 일주일에 세 번 치킨을 먹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치킨이 더 친근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음절과 음운이 유사한 것으로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부드럽든 거칠든 일관된 소리가 묶여 더욱 헷갈렸을지도 모른다. ‘ㅋ’과 ‘ㅊ’, ‘ㅣ’와 ‘ㄴ’의 일관됨이 발음을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 발음을 하다 보니 불현듯 키친에서 치킨 뜯고 싶다. 은은한 전등을 켜고 기름기 좔좔 흐르는 치킨을 뜯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싶다. 어쩐지 와인에 케이크를 곁들여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키친에서는 치킨이 더 잘 어울린다.

낭만을 꿈꾸는 여인들에게는 복장 터지는 소리일까.

그렇다. 아무래도 키친이라는 단어에는 거친 소리가 모여 있다. 열정이 날카롭게 칼이 될 수도 있다. 키스도 너무 많이 하면 입이 아프다. 키친은 안락한 가정을 상징한다. 그곳이 격정적인 구애의 말로만 넘친다면 생활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담백한 밥을 먹으며 일상을 얘기하고 때로는 통장 잔고 문제로 싸운다. 성질 난 남편이 대신 설거지하기로 해놓고 접시를 깨뜨리게 될 수도 있다.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키친이라는 발음과 어울린다.

다만 나는 아무래도 그 둘을 싸우게 하고 싶지는 않다.

키친은 여인들만의 공간이기도 하였으나, 지금에는 남자와 여자의 협력 공간이다. 키친의 구조와 식자재의 배치를 남편이 얼마나 잘 아느냐 하는 것이 가정의 화목을 재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

이 시대에 키친은 여인에게만 강요됐던 단독 공간으로서의 의미는 퇴색한다. 누구나 집의 주인이길 원하지만 키친의 지킴이로 전락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진심으로 내켜하지는 않으니 우리는 일단 이름부터 순화해야겠다. 정부에서도 분위기 쇄신한다는 차원에서 그냥 행전안전부를 안전행정부라고 바꾸기도 하는데, 그런 기관에서도 세금 써 홍보해가면서 이름 바꾸는데, 개인적으로 키친이라는 단어를 바꾸는 것쯤이야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키친 대신 ‘주방’이라는 한국말을 선택한다.

 

▪ 주방님, 주방님, 우리 주방님

이 단어만큼은 키친보다 주방이 좋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고 가족은 주방을 지킨다. 거기서 식사를 만들며 함께 잡담을 하기도 한다. 주의 방이다. 또한 사랑하는 주인의 방이며, 이것이 ‘치킨(닭살)’이라면, 주방은 그저 주인을 귀엽게 부르는 것으로 하자. 오라방이라고 오빠를 변용하듯, 우리 달링, 우리 주인, 허니 등을 주방이라고 바꾸어 불러보자. 서로 주방의 지킴이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 서로를 주방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부드러운 발음으로 불러보자. ‘웬만하면 오늘은 네가 주방에서 일을 하지 그래?’라고 이면적인 압력을 가하면서도 얼마나 화목하게 들리는가.

“우리 주방님, 주방님이니 주방에 계셔야죠? 사랑하는 주방님.”

그날따라 주방에 들어가기 무지 싫으면 딴청을 피우거나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있겠다.

마스크를 쓰고 대놓고 무언의 시위를 할 수도 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면 얼굴의 반이 가려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입매의 움직임은 그만큼 표정을 가늠할 때 중요하다. 입이 비쭉 나와 있으면 우리는 그가 토라졌다고 것을 눈치 챈다. 다만 심할 정도는 아닐 만큼만 삐쳤다는 것도 안다. ‘썩소’를 지으려고 입매의 한쪽을 급격히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표정을 읽을 때 입매는 중요하다.

그런데 마스크를 쓰면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말을 하는데도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말하는 이도 이물감을 느끼고 불편해서 마스크를 내리고 말하거나 아예 입안에서 말만 맴돌기도 한다. 그러면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나는 또 습관처럼 마스크를 바꾸어 부르고 만다. 마크스. 맑스(마르크스). 좌파적 시각은 때로는 웅얼거림으로 남는다. 온전히 선명한 발음이 되지 못한다. 언제나 중심을 견제하는 주변적 의견은 그렇다. 맑스가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닐진대 입 냄새가 배어 마치 맑스에서 냄새가 난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마스크 같다.

또 일본의 애니메이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도 떠오른다. 거대 로봇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만화 시대에서 더 나아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로봇 대신 새로운 로봇 만화의 개념을 내세워 신선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기 1999년, 북태평양, 오가사와라 제도 남아타리아 섬에 길이 1킬로미터가 넘는 우주전함이 추락한다. 이로써 외계인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인류는 지구를 하나의 정부로 통합하고 추락한 전함을 수리하여 ‘마크로스’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2009년 마크로스 진수식 당일, 지구 근처에 ‘젠트라디’라 불리는 외계인 함대가 출현하자 마크로스의 주포 시스템이 자동으로 작동하여 젠트라디군의 전함을 파괴한다. 이를 계기로 지구 통합정부와 젠트라디와의 전쟁이 발발하고 젠트라디와의 교전 중에 군인과 민간인 약 5만 8천명을 수용한 전함 마크로스가 명왕성 궤도 근처로 워프해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마크로스에 수용된 사람들은 전함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고 고향 지구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주1)

실로 스펙터클하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우주전쟁만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지구의 시민들과 다를 바 없이 가족 문제와 사랑 등을 고민하는 이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맞는지는 모르겠다.

만일 맞는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두고두고 기억되는 이유가 될 만하다. 세계 최강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변하지 않는 소박한 삶을 SF 판타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는 단순히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광활한 영역에서 통신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연인들의 그리움이 맺힌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하기야 지구는 우주에 속하므로 어찌 보면 우리는 언제나 우주에 산다. 우주는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그저 무아의 세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할 공간이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시간 동안 쌓인 거대한 유물(론)의 공간, 우주. 그러한 우주 저 편, 아주 먼 행성으로 떠나는 남자는 여자를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 내 목소리 당신에게 닿기까지

신카이 마코토의 단편 SF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에도 이것이 잘 드러난다. “10년 가까이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간과 우주를 뛰어넘는 소년 소녀의 사랑이야기”다. 그들은 휴대폰으로 소통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시간 소통이 아니다. 별의 빛이 몇 억 광년을 지나 지구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그 빛으로 별의 존재를 인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빛이다. 그 빛을 본 순간에도 그 별이 있을지 아무도 확답할 수 없다. 소통하지만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소통의 불완전함을 가장 애틋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사랑이란 이와 같지 않을까? 우주라는 가장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을 놓아두고도 이뤄지는 것.

그러면서 결코 만만치 않은 기다림.

「별의 목소리」에서는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낸다(고 알고 있다). 그 문자는 항상 시간을 길게 두고 전송된다. 거리 때문이다. 그러니 그 문자를 받았을 때 상대가 어떤 감정과 상태인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오로지 과거 그 문자를 보내는 순간만을 가늠할 수 있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기다림이다. 만일 주고받은 문자에 슬픔이나 외로움, 그리움이나 분노가 어려 있다면, 다음 문자를 애타게 기다리게 된다. 그는, 혹은 그녀는 지금 웃고 있을까? 그들은 결국 만나서 그동안 힘들었던 점, 자신의 달라진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하는 그 순간과 미래를 말할 수 있게 됐을까?

이 애니메이션, 마지막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고 한다. 두 주인공의 목소리로 서로가 서로에게 ‘나는 여기에 있어’라고 마음으로 속삭이면서.





(주1)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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