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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Jan 12. 2024

'척'과 '적' 사이

산문

‘척’이란 단어는 수직적이고 때때로 강직하게 들린다. ‘적’이란 단어가 꼭대기 한 획을 떼어내고 나서는, 그리하여 「산다라의 야자수」를 뽑고 나서는, 조금은 평이한 헤어스타일이 되었지만, 그래서 적은 날카로운 듯하였지만 시절을 머금고 조금은 물러난 단어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일 수 있다. 적은 자신을 숨기고 온다. 도무지 강성할 것처럼 보이지 않고 오는 적도 있다. 정말로 강한 적은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몸집을 키울 필요가 없다. 그러한 적은 정말로 상대의 숨통을 끊으려고 찬찬히 다가오는 존재다. 시작이 있기 전의 폭풍전야를 머금은 뒤, 시작과 함께 맹렬히 돌진하여 짧은 순간 모든 것을 끝낸다. 그러한 적은 진정한 킬러다. 무섭게 보일 필요 없고, 거대해 보일 필요 없다. 산책하듯 거리를 좁혀오는 적은 냉정하고 강렬하다.

적은 고독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적은 수직적일 수도 있지만 그러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적은 홀로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높아서 드러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상황이면 그 상황에 적응하며 최적의 성과를 노린다. 적은 실용적이다.

이처럼 실용적으로 건조하고 강력한 힘을 평이한 표정 속에 숨긴 단어로 ‘적’을 생각하였지만, 그래서 각지면서도 굳이 각을 의식하지 않는 적을 보며, 방향 모를 두려움에 불편해지더라도, 여전히 적은 위협적이지 않은 것처럼 딱딱하다. 칼날처럼 베일 듯한 모서리도 아니면서 마치 종이에도 살갗이 베이듯 아무렇지 않게 적은 내게 상처를 낼 수 있다.

그때 피라도 터져 나와 옷을 적신다면, 그 순간의 날카롭게 아픈 기억들이 젖어들 것이다. 적의 얼굴과 적의 땀내와 적의 눈빛이 기억되고, 하나하나 기억된 일로 적적해진다. 모든 게 적과 함께 있으므로 적적해지는 것은 아주 고역스러운 일이겠지만, 역설적으로 적은 사라져 온통 마음 안에서만 적적해질 뿐이다. 이때 비로소 부드러운 적, 여전히 조금은 불편한 정적이 흐른다. 적이 둘이 붙어 더 지독해질 줄 알았는데, 그럭저럭 참을 만한 적이 된다.

적적해진 마음 밭에서는 적들이 상대를 향하여 공격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으므로, 적에게도 나태한 의지만이 자라나 머리에 야자수를 얹을 수 있다. 휴전선을 가로지르며 적은 없고, 척이 있다. 크고 높은 강직함의 의례마저 거추장스러울 극한 상황을 대비하지만, 그런 평화 시에는 규칙의 엄격함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군기를 세우다 보니 더 크게 보이는 ‘척’의 모습을 띤다. 척은 공격을 하지 않고, 조금 크게 보일 뿐이다. 때로는 내실도 있다. 척은 그런 척하기도 하지만, 척척 자신이 알아서 과제를 수행하기도 한다. 척은 똑똑하기도 한 셈이다. 척은 상대와 호응하여 척하면 척하고 무술의 합을 맞추기도 한다. 진짜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적의 시절이 아니므로, 그저 약속된 훈련 속에서 반듯한 규칙의 흐름을 존중한다.

척은 높고 반듯한 것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고독하지는 않다. 그에겐 언제나 함께해줄 다른 척이 필요하다. 척하면 척해야 한다. 어쩌면 열렬히 살아가고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약속을 사랑하고 그리움을 신뢰하는, 그러면서 때로는 그것을 모른 척하기도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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