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원이 Sep 16. 2023

버려진 섬마다

산문


김훈은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은) 피었다”에서 조사 ‘이’와 ‘은’을 놓고 한동안 고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선택했다. <바다의 기별>에서 그는 단지 조사만 다를 뿐인 두 문장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반해,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는 의견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꽃이(은) 피었다”라는 구절만을 놓고 볼 땐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조사 ‘이’를 택했다는 그의 설명은 다소 어색하게 들린다. 사실 첫 문장은 대단히 주관적인 의견이 담긴 문장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주관적인 의견이 철철 넘치는데, 고작 ‘은’과 ‘이’로 생기는 차이가 엄청나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무래도 과장되게 들릴 뿐이다. 작가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지만, 사실과 의견의 차이가 문장을 선택한 결정적인 기준이 된 것처럼 말한 것은 수정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유인즉, 두 문장 모두 ‘버려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섬이 버려지다? 그렇다면 ‘누군가’ 혹은 ‘무엇이’ 섬을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섬은 늘 자연의 상태로 있거늘 누가 혹은 무엇이 ‘감히’ 섬을 버릴 수 있을까? 말하자면 이 수식어 하나만으로 이 문장은 시적 진실 혹은 시적 사실로서 강력하게 기능하지만, 동시에 객관적으로는 의견으로서 드러날 뿐이다. 굳이 작가가 종래에 설명한 선택 기준을 버리지 않고 문장을 수정하는 쪽을 택하자면, 그 누구도 섬을 버릴 수 없으므로, 섬은 그냥 존재할 뿐이라는 걸 드러내야 할 것이다. (꽃‘은’ 핀 것이 아니라, 꽃‘이’ 피었듯이.) 예컨대, 

 

(a) (인간의 기준에서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척박한 환경을 지녔기에 가치 없는, 그래서 사람이 원래부터 살지 않는) 섬마다 꽃이(은) 피었다.

(b) (사람이 살았지만, 이제는 떠나버린) 섬마다 꽃이(은) 피었다. 

(c) (단순히 인적이 닿지 않는) 섬마다 꽃이(은) 피었다.

 

등의 표현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지루하고 한심한 문장으로만 남아있을 듯하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문장을 수정하기보다는 작가의 선택 기준을 바꾸어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한다. 즉 

 

(d)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e)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라는 두 문장은 사실과 의견이라는 이유로 나뉘었다기보다는 비장함을 바라보는 태도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d)의 경우 ‘버려진’이라는 단어에 짙게 배어있는 강렬한 패배 혹은 비장한 슬픔이 문장 전체를 뒤덮고 있지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꽃‘이’ 필 뿐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아무리 그 전 날 온 세상이 뒤집힐 듯한 사건이 벌어진다 해도 그 다음날 해는 뜨기 마련인 것처럼, 꽃이 피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장한 진실을 바라보는 자의 허무가 깔려있다. 어떤 경우에라도 쉽게 감정이 흔들리지 않으려하면서 사건을 담담히 바라보는 자세가 엿보인다. 전체적이고도 주관적인 ‘의견’에 작고도 객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조사 ‘이’를 첨가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허무주의자의 태도>를 담아낼 수 있었다. 

반면 (e)의 경우, 비극적이거나 비장한 대상 앞에서 꽃‘은’ 굴하지 않고 핀다. ‘은’이라는 조사 때문에 꽃이 선택되어 도드라진다. 버려진 섬‘인데도 불구하고,’ 꽃이라는 존재가 피는 것이다. 그렇게 꽃‘은’ 조금 특별한 존재가 된다. 김수영의 ‘풀’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전체적이고도 주관적인 ‘의견’에 또 하나의 ‘의견’을 담아낸 조사 ‘은’이 첨가되면서, 어떤 현실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여기서는 <역사를 바라보는 사회운동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요컨대 작가가 두 문장 중 하나를 선택한 기준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 혹은 의견으로서 더하냐 덜하냐하는 정도의 차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칼의 노래>의 전체적인 기조를 감안했을 때 (d)를 선택한 것은 적절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