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희정 & 천재론
[목차: 천재론] 57편 중 10번 원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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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희정: 사회가 스스로 필요한 내용을 채우기 위해 천재를 승인한다
하지만 사회는 자신이 필요한 걸 분명히 감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고등 생물 같아요. 그래서 당대에 필요한 것에 더 천착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당대에 필요한 재원 중 적합한 천재가 탄생하는 거고요. 당대의 천재들 역할이 문화사적으로 더 큰 건 그런 이유라고 봐요. 뒤늦게 발굴되는 불운한 천재들은 자의든 타의든 탈보편적인 면을 보이면서 그만큼 후순위로 밀렸겠죠. 어쩌면 아직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묻혀 있을 수도 있고요. 탈보편적인 천재들이 주류로부터 탈주했다기보다는 사회의 인정을 갈구하지만,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승인받지 못한 존재로 남은 것이죠. 밀려난 존재, 표류하는 존재겠죠. 혹은 처음에는 인정받은 듯하다가 찬찬히 밀려나 잊히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요?
인습에서 탈주하는 모험가 이미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과장되었다고 봐요. 어떤 면에서는 멋지게 포장된 것일 뿐이지, 당대의 방식으로 수용되기엔 부족한 면이 있었어요. 자신이 지닌 일탈적 개성을 포장하여 사회에 항의하며 드러누운 것이란 생각도 해요. 그들이 세상의 모든 걸 뒤집어엎으면서 흔들었다기보다는, 세상이 그런 예상치 않았던 천재들의 당돌한 자극을 뒤늦게 인정하고 품어주고 승인해준다는 게 맞을 듯해요. 대개는 패기 있는 탐험, 혹은 담대한 협상에 나서서 어떤 이는 당대에 끝내는 성공하고, 또 어떤 이는 위험하다는 판정을 받아서 밀려나는 결과를 견뎌야 했겠죠. 또 어떤 이는 협상을 원했지만, 현관문 밖에서 시위만 하다가 시들했겠죠. 세상의 무관심에 어정쩡한 상태로 있다가도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도 못한 채 무기력하게 견뎠겠죠.
이 지점에서 제가 주로 상상하는, 밀려난 채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천재들의 모습이 그려져요. 결국 당대에서 요구하는 실력은 없었던 자들이죠. 기량이 뛰어나서 당대에 천재로 인정받던 이들이 대개는 문화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내는 동안, 패자부활전에서 재반등을 기대하며 그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붙들며 자기 생애를 감당했겠죠.
고흐나 고갱, 포우, 페소아, 카프카, 보들레르, 멜빌 등등 그리 많지 않은 이들이 여기에 속하죠. <저주받은 걸작>이란 표현은 사실 그들에 대한 경이로움과 공동체의 어리석음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사탄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하죠. 어찌 보면 주어진 한계 속에서도 사회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천재들을 발굴한 것이니까요. 여전히 더 많은 천재가 제때에 발굴된다고 본다면, 그 와중에 놓쳤던 존재들에 대해 약간의 유감,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봐야겠죠.
물론 그러한 경우를 더 줄이기 위해서 더 노력하겠죠. 언제나 어쩔 수 없이 생길 누락이라고 보지만, 더 많은 경험을 통하여 다양한 가치가 공존한다면 사회에선 다양한 재능에 대해 더 적절하게 제때에 대응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밀려났던 탈보편적인 천재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재즈 자체가 그런 천재적인 인물 같다는 몽상도 하죠. 재즈의 유행이 지나기 전에는 온통 재즈적인 편곡이 울려 퍼지던 시절이 있었어요. 1920~1940년대, 혹은 1950년대까지가 재즈의 전성기라고 해야겠죠. 미학적으로도 재즈사에 유의미하게 중심에 있었던 때를 보면 1920~1940년대 중반까지 빅밴드 편성은 재즈사의 주류였고요. 1930년대 후반부터는 스윙이 쉴 새 없이 사람의 춤 본능에 자극을 주었고요. 1950년대 헐리우드 전성기 때 배경음악을 보아도 그렇고, 뮤지컬에선 더더욱 재즈 음악이 큰 비중으로 쓰였어요. 우리나라 인기곡만 보아도 1950년대라든지 60년대에는 분명 관악기 편성부터 재즈풍의 연주가 만연했어요. 대중음악의 어머니가 재즈라고 했을 때 그냥 수사적인 의미로만 여겼는데, 정말 그 시절 음악을 찾아보니, 팝음악에서 재즈 친화적인 편성이 많더라고요. 왜 대중음악의 어머니가 재즈인지 여러 고민을 해보았는데, 그냥 그 시절 음악을 들으니 알겠더라고요. ‘아, 대중음악의 어머니 맞구나’ 하고요.
하지만 재즈도 인기가 시들해지고, 과연 그 당시에도 팝음악만큼 뜨겁게 인기가 있었는지 따져봐야 할 정도로 추억도 시들해진 만성 비인기 장르가 되고 말아요. 렘브란트처럼요. 그도 <야경>의 진보적인 시도로 많은 비난에 시달리며 겪고 집단초상화가로서 명성에 흠집이 난 뒤로는, 영영 예전만큼 명성을 회복하지는 못했잖아요. 재즈는 예술가 음악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면서 비밥에서 프리재즈로, 포스트밥으로 다양한 표현 자유의 여행을 다녔지만, 전 이러한 재즈가 너무도 좋지만, 이제 재즈는 보편적으로 인기가 많은 장르는 아니에요. 어려운 음악이 되었죠. 그 어느 것에서도 빅밴드 시절만큼의 화려한 인기를 되찾지는 못했어요.
어쩌면 비틀즈 이후로 폭발한 팝과 록의 전성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엄청나게 다양하게 분화된 장르의 빅뱅 시절이 지나고 거대한 대중음악의 우주가 탄생하면서 재즈는 변방으로 밀려났다고 해야겠죠. 그렇게 재즈는 빅밴드 시대의 화려한 인기를 접고 서서히 고독한 예술가의 음악으로 변모하죠. 이때 재즈의 모험을 부각하면 천재의 모습이란 보편적인 주류에서 탈주하는 모험가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겠지만, 또 묵묵하게 재즈의 옛 모습을 기억하며 꿋꿋하게 예술적 태도를 지키지만 끝내 옛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하는 모습도 중첩되죠.
최근 롤링스톤즈 500대 명반이던가요? 솔직히 별 관심은 없는데, 그 음반 리스트에서도 재즈의 명반들이 많이 뒤로 밀러거나 빠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세계적인 명드러머를 뽑을 때도 록 드러머 위주로 뽑힌다든지 하는 것이요. 아, 록도 요즘 퇴조한다죠? 이제 록도 점점 주류에서 밀려나는 모습을 보이죠.
각 장르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때는 보편적으로 통하는 천재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그 분야의 인기가 퇴조하면서 점점 영향력이 떨어지는 거죠. 지금 와서 우리는 판소리의 명인이나 천재를 기억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시간이 더 흘러서 판소리의 명맥이 끊긴다면 음반도 없는 조선의 명창들을 대중이 기억하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고려속요의 천재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운이 좋거나 나중에 그 분야가 되살아나면 관련 천재들이 재등판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세상에서 잊히고 말죠.
반대로 클래식이라는 장르는 보편적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바흐라는 위대한 인물이 재조명 받는 것이겠죠. 만일 클래식 분야에서 많은 보편적 천재들과 명인들이 활약하지 못했다면 세상에 영향을 줄 만큼 성과가 축적되지 못했을 것이고 클래식의 영향력은 초기부터 급속히 줄었겠죠. 그러면 바로크 시대에 보편적 주류에서 벗어난 천재였던 바흐 같은 이가 멘델스존에게 발굴되어 재평가 받는 사건은 아예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의미가 현저히 축소되었을 거예요. 지금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 음악 장르가 되었다면 말이죠.
결국 천재들도 집단이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에두아르 마네가 끝까지 홀로 있었다면, 그의 바람처럼 운 좋게 아카데믹한 체제의 끝 좌석에 자리했거나 영원히 무의미했을 수도 있어요. 클로드 모네는 많은 동료와 함께하면서 덜 외로웠죠. 인상파 집단이 마네를 호출해준 덕분에 그 위대함을 기억해줄 동료들이 생겼고요. 고흐나 고갱은 인상파 주류 흐름에서 벗어나 있어서 헛돌았고 그 사조가 무르익기 전에 동료를 많이 규합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후기 인상파라는 움직임을 승인받으면서 비로소 불멸의 천재로 인정받죠. 그렇게 명성이 생긴 다음부터는 혼자서만 사회에 인정받는다기보다는, 그가 속한 집단이 사회의 주류로 기능하죠. 그 집단 구성원들이 그들을 대표해주는 천재들을 기억해주는 것이고요. 그 집단에서 마련한 해석을 통하여 사회에서도 어떤 인물을 천재로 인식하는 각종 근거를 제공받죠. 고흐를 설명하는 후기 인상파의 이론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런 게 가능했던 대중음악 장르 중에서도 분명 지금 위상이 높아진 장르가 있죠. 지금 당장 알앤비와 힙합이 떠오르네요. 대중음악사에서 결과론적으로 후대에 누가 영향을 많이 주었는지를 따지게 된다면 결국 보편적인 주류에 속하는 쪽이 더 유리해지죠. 물론 대중음악 장르는 부침이 심해서 앞으로 어찌될지 장담하긴 어렵긴 하죠.
만일 그들이 활약하는 분야가 극도로 위축되거나 사라진다면, 해당 분야의 종사자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분야와 함께 사장될 수 있어요. 생존을 위해 그 분야 자체의 체질 개선을 시도하든, 다른 어딘가로 편입해야 하든, 대변혁기를 맞겠죠. 예를 들어 오래 전 연금술에도 저명한 존재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누구도 기억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지 못하죠. 천동설에 기반을 둔 학자들은 어떨까요? 지금 시점에서 보면 그때의 저명한 존재들은 다 공허한 면이 있어요. 당시의 의의라는 게 있더라도 한계가 있죠.
그렇다면 최근 위험한 실험도 마다하지 않는 바이오해커는 어떨까요? 인체에 유전자편집 기술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위험천만하죠. 그들의 행위는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주장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보편적 윤리의 위반에 대한 강한 우려를 씻을 수 있을까요? 그러지 못한다면 결국 합법적 집단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난항을 겪겠죠. 과거 종교적 이단으로 규정받아 집단 자체가 소멸되면서 그와 관련된 기여자들도 함께 사라지기도 하는데, 때로는 정당하게 벌을 받는 경우도 있어요. 어느 쪽인지 때로는 당대에는 판단하기 어렵겠지만, 어떤 경우엔 당시의 판단이 크게 틀리지 않지요. 정말이지 예술에서는 그나마 낫지, 과학 영역으로 옮겨보면 보편적 주류에서 어긋난 탈보편적 존재는 대개는 말 그대로 안 좋은 의미로 위험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