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희정 & 천재론
[목차: 천재론] 57편 중 12번 원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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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희정: 예술계와 달리 과학계의 천재는 보편적 주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미 모든 게 갖추어지고 치열한 경합이 벌어지는 영역이 바로 보편적인 주류일 거예요. 이곳에선 되도록 객관적으로 검증된 공인 전문가들이 양산되고 거기에서도 수없는 이들이 수재와 천재로 호명되죠. 보편적 주류에 속한 천재들이 세상에서 더 많은 기여를 할 가능성이 있죠. 아무래도 더 많은 기회가 체계적으로 주어지니까요.
물론 열심히 노력해서 보편적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은 재능을 지녔더라도, 사실 보편적 주류가 되는 요건은 여러 가지죠. 예를 들어 미국에서 아시아 여성이란 주류이기 어려웠죠. 이런 상황에서 설령 실력으로 보편적 주류에 속할 만하다고 해도 여러 장애가 발생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불행한 공격을 당하는 경우도 생기고요. 이때 그의 생명을 잃게 되면, 그는 영영 보편적 주류에 속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한 채 작품만이 홀로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요. 창작자도 아닌 사람들이 그 작품을 이해할 때까지 무기한 기다려야 하는 거죠. <딕테>를 쓴 차학경의 사례가 그랬어요. 그가 살아 있었다면 미국 문학의 보편적 주류에 속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살아있어도 보편적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을까요? 적어도 아시아 여성이라는 점에선 보편적 주류로 온전히 진입하지 못한 지금이긴 해요.
이처럼 예술가의 경우 주류의 외곽에서 등장하는 이벤트가 상대적으로 자주 일어나는데, 학계에서도 시스템 안에서 훈련된 전문가의 역할 비중이 큰 과학계에선 그럴 가능성이 낮은 편이죠. 레오나르도 다빈치 시절에야 과학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해서 ‘철학하고 예술하는’ 사람이 과학적 상상과 시도를 하는 아마추어적인 접근도 있었지만, 고도로 전문화된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부터는 도저히 그러기가 쉽지 않아요. 과학에서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는 낭만적 가능성, 그러한 정서적인 면을 싹 걷어내죠. 20세기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이르면 도대체 누가 그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조차 그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라고 하잖아요. 혼자서 모든 걸 해내는 시절도 점점 저물고 있어요.
하기야 근대의 뉴튼조차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다는 말을 했었다죠? 그만큼 그동안의 고군분투로 학계의 지성들이 쌓아올린 성과 위에서부터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그의 말처럼, 철저하게 현실적 성과에 기반해서 많은 연구진의 힘이 모여 그 위를 쌓아올리잖아요. 그것은 굉장히 이지적이고 난해하죠. 그리고 그건 흔히 생각하듯 대중에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보편적인 기본을 바탕에 둔 성과에요. 학계는 정착되고 보편적인 주류로, 과학적 지식의 신뢰도를 책임지고 공증하는 역할을 하죠. 이런 분야에서 보편적 주류를 벗어난 천재라는 걸 상상하기란 쉽지 않아요.
역사학에서도 환단고기처럼 당혹스러운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듯이, 과학계에서도 유사과학으로 빠질 위험이 있죠. 의학에서 잘못된 견해를 포장해서는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있잖아요. 이런 도덕적 일탈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을 마치 보편적 주류에게 부당하게 외면당한 피해로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혹자는 갈릴레이가 당대에 종교계에 반하는 이단적인 주장으로 진리인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이단적인 주장을 했다고 보편적 주류에서 벗어난 건 아니죠. 물론 종교계가 주류였던 것으로 보면 전체 사회에서는 이단적이지만, 당시 그는 이미 저명한 학자였어요. 종교계에서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과학계에서 그는 이미 자기 명성을 확립하고 있었기에, 이 문제를 더는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죠.
그나마 이때만 해도 천동설처럼 지금은 잘못된 사실을 기반에 둔 과학을 할 때였기 때문에 현대과학이라 할 수 없을 과학계 바깥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는 게 가능했던 시절이기는 하죠. 당시에 이론적인 접근을 하거나, 철학에 기반을 두거나, 간단한 실측을 하던 시대였으니 여러 모로 보편적 주류에서 벗어난 코페르니쿠스와 같이 전복적인 힘을 발휘한 천재들이 탄생할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달라요. 고도로 전문화되고 굉장히 빡빡한 성과가 쌓였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실 관계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분야에서, 독단적으로 모든 걸 뒤엎는 작업을 해내기란 갈수록 불가능에 가까워지죠.
낭만은 사라진 것이겠지만, 생각보다 사회 시스템은 어리석지 않아서 인류의 자산을 꽤 성실하고 집요하게 축적하는 방법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죠.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성과에 짓눌리지 않고 누구보다도 탁월하고 경이롭게 다음 과정을 수행하는 자들 중 일부를 천재라고 명명하죠. 보편적 주류에 속한 천재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