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민규 & 천재론3
[목차: 천재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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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민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믿으며, 새로울 엄두도 못 내고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논리가 굉장히 잘 먹히는 곳이 한국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사회가 치열하게 이미 검증된 분야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발전했고요. 효율성마저 극대화하다 보니 모색하고 여유를 지닐 시간조차 낭비라고 여기죠. 월화수목금금금, 창의적인 머리 대신 예상 가능한 루틴을 돌린다고 해야 할까요. 사회가 면밀히 짜놓은 과정을 인간은 수행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 이상으로 시도를 하게 되면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들어요. 이미 검증에 검증을 거친, 탄탄한 성공 공식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제도는 정교하죠. 함부로 넘어서기 힘들어보일 만큼 대단한 권위도 있고요.
늘 드는 생각이지만, 사실 천재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진짜 천재가 있기는 할까, 하는 의심도 들어요. 이미 나올 만큼 나왔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에선 많은 아이디어를 강박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모아댔으니까요. 사실 인류 지식의 폭발적인 확장도 불과 몇 백 년 안에 이뤄졌잖아요.
그래서 많은 것이 나온 상황에서 말하자면 새로움도 확률 게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 조합을 할 창의적 원자는 정해져 있다고 보거든요. 만물의 터전인 우주도 그렇잖아요. 하물며 우주도 확률적으로 한계가 있는데, 고작 인간의 아이디어라면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고, 나올 만한 건 다 나왔다는 생각이 들죠. 처음에 새로운 분야에 열광에서 파고들지만 점점 다른 분야와 연계되지 않은 것이 없고, 전범이 없는 새로운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그냥 시류에 맞게 약간씩만 고쳐서 새로운 유행을 형성할 뿐이라고요.
그걸 넘어서겠다는 경우는 대개 망상에 불과할지도 몰라요. 창의력조차 사실은 대개 다 엇비슷하거든요. 처음엔 혁신적인 줄 알았는데 조금만 교차검증을 해보아도, 예전부터 축적된 사례 목록에서 다 찾을 수 있다는 게 밝혀질 뿐이죠. 사회도 생각보다 빡빡하게 튼튼한 거죠. 감히 우습게보고 혁신을 하겠네 뭐네 하다가 큰코다치는 거고요.
사회에서 바라는 천재는 원하는 분야에서 기술력이 뛰어난 존재죠.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존재는 사회의 틀을 바꾸니 불편한 요구를 하는 셈이에요. 굉장한 비용을 사회에서 감당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그런 존재는 악마화될 수 있고, 하찮게 여겨질 수 있어요. 아주 권위 있는 존재, 특히 해외의 권위 있는 석학이거나 선진국에서 최근 트렌드로 벌이는 일이라면 좀 달리 보겠지만요. 그런 게 아니라면 지금 검증되다 못해 확증된 테크닉을 고난도로 연마해서 펼쳐보일 수 있는 존재, 아, 그 테크닉은 사회에서 필요한 것으로 오래 전부터 판명난 분야의 테크닉이어야겠죠. 그런 면에서 보편적인 분야의 테크닉을 최고로 펼치는 사람을 숭상하기 마련이죠. 그런 선택을 통해 한국사회가 고속으로 발전하는 데에 성공한 건 분명해요.
그렇다고 한국 사회의 모든 역량이 대단하고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분명 획일적으로 하나만 특화시켜 비정상적으로 발전해온 것도 맞죠. 그게 당시에는 당위성이 있었겠지만, 큰 규모의 사회가 움직이려고 합의하고 나서는 아직까지도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채 관성적으로 기형적으로 몸집이 커진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무슨 거부할 수 없을 큰 타격을 받아야만 궤도 수정을 할 것 같다고도 해야죠.
쉽진 않겠죠. 태생적인 한계도 있으니까요. 일부러 그리 된 게 아니라는 의미죠. 우리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수출 중심으로 비교우위를 따진 것이잖아요. 그렇게 노동력 집약적인 산업부터 시작해서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 집약적인 산업으로 옮겨온 것이죠. 이에 맞춰 컴퓨터 공학이라든지 수출 제품에 맞는 인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해낸 것이고요. 이런 인력을 양산하는 데 우리 식의 반복적 암기식 교육도 일정 정도 순기능을 한 것이 사실이죠. 더 많은 고난도 문제를 빨리 풀어내는 것이요. 이해력과 분석력이 좋고 적당한 응용력을 위해서 그런 테크닉 훈련은 효과적이었다고 봐요.
이게 창의적인 분야에서도 K팝처럼 약간만 우리 스타일로 응용했지만, 사실은 외국에 모두 있는 소스를 재조합해서 수출한다고 해야 할까요? 문화상품도 그런 맥락의 연장선이라고 봐요. 결국 프랑스 등지에서 새로운 예술이나 문화를 자기의 목록 안에 축적하여 100을 채우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지닌 1을 세련되게 정련하는 것인데, 그것을 해외에서 상찬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하나만 가진 셈이죠. 그들은 100 중 1을 더 알아보는 것에서 긍지를 느낀다면요.
그런 점이 아직 우리 문화산업의 불안한 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속가능하려면 더 많은 창의적 시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죠. 해외에서도 예상을 넘어서는 어떤 놀라운 아이디어를 정착시켜서 보여줄 수 있다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우리를 배우려고 오는 분위기가 장기간 형성되겠죠.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요. 학교에서 알아듣지도 못할 영어로 수업한다고 세계화가 되는 것이라 생각지 않아요. 우리가 그들을 주도하는 아이디어를 양산해낼 때 그들이 우리말을 배워서 그걸 공부해보려고 할 거예요. 하지만 당장엔 외신이나 외국의 권위 있는 상을 받는 게 더 중요한 분위기죠. 우리는 인정욕구에 목말라 있어서 사람들은 늘 외국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보고 그들의 기준에 맞추려 하죠.
과학계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해외에서 인정받아야 과학자로서 주목받죠. 이는 연구비를 받아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죠. 그게 아니라면 당장 응용 분야에서 상용화 비전을 제시하여 지속적인 투자를 받아야 하죠. 기업이라면 큰돈이 들면서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것을 참아내는 편이 아니었잖아요. 바로 성적표에 반영된 성과가 다음 연구 진행에도 영향을 주죠. 당장 필요한 데서 눈에 보이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죠. 안 그러면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니까요. 또 오랜 교육을 받으면서 그런 대세를 거스르는 기본기를 배운 적은 없어요. 살다 보면 시류에 맞춰 가야 한다는 집단주의적 논리가 더 먹히는 나라니까요.
그러다 보니 남 눈치 보지 않고, 진득하게 깊이 파고들어 새로운 결과물을 내어서 그것을 통한 본질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은 우리의 취향은 아니었어요. 그런 게 해외에서 성과를 내는 데 그동안 미진했던 이유겠죠. 지금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고, 결국 우리의 국력에 맞춰 좋은 쪽으로 변화해나갈 것으로 믿지만, 그냥 믿기만 해서도 안 되겠죠.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기본적으로 경제 규모가 크더라도 내수 시장이 크다고 하긴 어렵죠. 인구가 1억도 안 되니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좋은 여건이라 보긴 어렵다잖아요. 일단 경제적 조건에서 수출 지향적이라는 특성, 우리가 세계 흐름을 좇을 수밖에 없죠. 트렌드를 창출하자니 우리가 을의 위치에 있죠. 인구가 많아 내수 시장이 크고 땅이 넓어서 지역 문화가 천차만별이었다면, 여러 가치가 들어설 여지가 컸을 거예요. 자연히 경합 속에서 새로운 창의성이 발현될 가능성도 높아졌을 거고요. 무엇보다 세계 유행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대응할 필요도 적었을 거예요. ‘중국에서는 숟가락만 잘 만들어도 평생 먹고 산다’는 농담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일지는 몰라도 여하튼 그만큼 작은 제품 하나도 잘 만들면 충분히 그걸 사줄 수요가 있다는 것을 부러워서 한 말일 거예요. 눈치를 안 볼 수 있을 여건은 소신 있는 행보를 지탱해줄 수요의 힘에 비례하기도 하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수요가 일부에만 몰려 있어요. 더구나 한국의 문화적 요건을 보면, 나이에 따라 눈치를 많이 봐야 하죠. 설령 수요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 심리적인 부담은 여전해요. 성공 확률은 성공할 때까지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니까요. 모험은 젊었을 때나 하는 거죠. 유교 문화의 잔재일까요? 어른이 되어서 철이 들지 않는다거나 아버지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강해요. 낙오자로 인식한다든가요. 경쟁에서 낙오하면 한심한 존재로 보이죠. 그래서 남들처럼 사는 것에 온 힘을 집중하죠.
이러한 분위기를 무릅쓰고 모험하려는 어려운 결정을 한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죠. 제도적으로 사회의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 존재들을 열외자로 두는 것 같죠. 대학갈 나이에는 제때에 대학을 가야 하고, 결혼해야 할 때는 적당히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 하죠. 결혼해서 대기업의 안정된 월급이 중요해지고, 아파트를 사야 하죠. 아버지 될 나이에는 자식 걱정으로 여념 없어야 하고요.
만일 여기서 어긋나면 인생 망가진 것처럼 여기는 불가역적인 사회다 보니, 모험할 사람은 많지 않아요. 회생 절차가 다양하다면 KFC 할아버지처럼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꿈을 꿀 수 있겠죠. 첨단 산업에 도전하다가 회생 절차를 통하여 자기 나이대의 역할을 하기 위해 사회로 복귀할 수도 있고요. 그런 장치가 잘 되어 있다면 눈치를 덜 보고 모험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건 어차피 실패를 통한 복귀라 여전히 온전히 보상을 해줄 순 없겠죠. 그러면 안정된 역할을 수행하던 사람들이 화를 낼 거예요. 건설적인 도전에 대해선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겠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겠죠.
저는 이러한 요건 중에서 제도적인 면에서는 모험하는 사람들을 벼랑으로 몰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 정도는 필요하다고 봐요. 문화적 요건에서는 더 다양한 꿈을 지닐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서든 점진적인 인식 개선을 통해서든 시민이 공동체의 역할에 너무 얽매이지 않도록 비혼이든 무자녀 부부든 그들이 열외자로 인식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내수 시장이 커지면 좋겠지만 인구가 갑자기 증가할 일은 없겠죠. 아시아 문화권이나 세계 문화권이 한국 문화를 호출하고 한국을 문화의 리더국으로 인지하도록 노력해 문화적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노력일 거예요.
우리가 스스로를 인정하고 눈치 보기를 넘어서 능동적으로 규칙을 만들어내는 자부심을 경험하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