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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단의 천재를 호출하는 동료가 되고 싶어요

[3.1]희정 & 천재론 3.2

by 희원이

[목차: 천재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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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희정: 우리 집단의 천재를 호출하는 동료가 되고 싶어요

아무래도 민규 씨가 말한 덕목이 더 많이 적용된다는 것이니, 민규 씨 쪽에 손을 들어준 거라고도 봐야 할까요? 하지만 동호 씨의 의견 역시 중요해요. 절대로 외면할 수 없을 부분을 말하고 있거든요.

동호 씨의 생각으로 보면 천재가 역사의 주요한 문장을 주도적으로 써내는 것이고, 민규 씨 의견대로라면 사회가 역사의 주요한 문장을 거의 다 쓰는 것이죠. 그런데 제 생각대로라면 대개 사회가 역사의 주요한 문장을 쓰는데, 그 교정 교열과 윤문뿐 아니라 마지막 마침표는 천재라는 개인이 찍는 것이라고 해야겠죠.


결국 소집단이라는 작은 사회가 잘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회 주도적 입장을 말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동료들 중 뛰어난 천재가 압도적인 능력으로 그 소집단을 각인시킬 능력이 없다면 보편적 주류의 사회는 미동도 하지 않겠죠. 또 보편성의 천재가 대중의 가슴을 흔들어놓지 않는다면, 그만큼 소집단의 생존 가능성도 낮아지는 거고요. 이를 수재들이 해내기도 하지만, 매번 아주 강렬한 존재들이 작은 사회로부터 천재로 호명되고, 그중 어떤 성과는 정말 그 사람 아니면 어렵겠다 싶은 게 있다는 거죠. 루이 암스트롱이 없어도 재즈는 있었겠지만 지금의 재즈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평가처럼요.


재즈의 임프로비제이션은 과거의 클래식에서 카덴차 전통이 있는 것을 연상시켜요. 하지만 직접적인 관련은 없겠죠. 오히려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몰랐던 흑인들의 사회적 상황과 연결 짓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즉 클래식이 작곡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재즈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발전해도 이상하지 않고요.

그런데 적어도 루이 암스트롱 시대에 루이는 스캣 등의 즉흥에 관련된 미학을 확실하게 해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모던재즈 시대에 더욱 구체화되고요. 빅밴드에서 짜여진 춤곡을 연주하는 것을 넘어 연주자 중심의 임프로비제이션을 노골적으로 도입 적용했으니까요. 이런 점이 클래식에 영향을 받았으면서 클래식이 흡수되지 않고 대비되는 유의미한 전통을 수립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죠.

만일 베니 굿맨이 재즈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혹은 클래식 작곡가였던 조지 거쉬인이 재즈를 규정하는 천재로 호명되었다고 하면 또 어떨까요? 분명 달랐을 거예요. 아무나 그 역할을 대체하긴 어려웠겠죠. 사회에 내재된 가치나 방향을 고려할 때 반드시 흑인 주도적인 미학으로 재즈가 흘러갈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는 것이죠. 그때 흑인 음악가들이 재즈를 주도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고요. 여러 가능성 중 한 방향으로 주도적으로 흘러가게끔 개인들이 움직인 거죠.


제 경우엔 클래식을 전공했어요. 나름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고요. 그런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죠. 콩쿠르 성적을 위해 쇼팽의 음악 세계를 고민하고 있다 보니 문득,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나의 음악 세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싶었죠. 그렇다고 그게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고, 그냥 저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었죠.

그런 점에서 록이나 재즈 분야에서는 자기가 하려는 음악을 하잖아요. 특히 피아노 연주자인데다가 연주자 중심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재즈가 눈에 들어왔죠. 유럽의 현대재즈를 보면 클래시컬한 면도 강해서 제가 원하는 음악을 하려고 할 때 재즈라면 주파수가 딱 맞다 싶었어요. 만일 클래식 분야밖에 없는 채로, 매우 단순한 경음악을 선술집에서 연주하는 상황이었다면 갈등했을 거예요. 아무도 제가 작곡한 것을 비평해주지 않고, 전문 레이블이 없었더라도 더 힘들게 고민했겠죠.

다행히 재즈가 있었기에 그 전통에 그대로 기대서 가면 된다는 점에서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모든 걸 개척해야 한다면, 결국 저처럼 용기 없는 이들은 오래 전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을 거예요. 그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라는 거죠.

이제 바라는 게 있다면 재즈계에서 프로 음악가로 활동하고 싶다는 거고요, 조금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저처럼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 지망생들이 제가 이룩한 작은 성과를 참고하면서 조금 더 편하게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저도 1930년대 유럽의 선구자들 덕분에 시작된 재즈의 유럽화 덕분에 클래시컬하고 작곡 중심의 연주도 저평가되지 않는 시절을 살고 있는 걸요.

우리 각자의 작은 진취성만으로도 괜찮은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런 이들이 종종 정말 뛰어난 누군가를 천재로 호출해서, 조금 더 진보적인 사건을 공증해주기도 하겠죠. 그러면 더 즐거울 거예요. 저는 늘 그런 순간을 기대하고 목격할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감독님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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