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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Nov 09. 2023

파인더, 파인더: 레이몬드 카버의 ‘파인더’를 읽은 후

콩트

그는 고민에 빠졌다. 벌써 세 시간 째 집 앞을 서성이며 땀을 흘리는 남자를 들어오게 할까.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레이몬드 카버의 〈파인더〉에 등장하는 사진사처럼 크롬제 의수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멀쩡한 두 팔을 지닌 남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고 동네를 여러 차례 돈 듯했다.

직접 도는 걸 지켜보지는 않았지만 동네를 한 바퀴 돌 법한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남자는 어김없이 그의 집 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원래 땀이 많은 체질인지 그의 집 앞에서 땀을 닦곤 했다. 수건으로 쉴 새 없이 땀을 닦아댔지만, 남자의 노력이 역부족인 듯 보였다. 땀을 닦으면서 남자는 간헐적으로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고 뭔가를 찍었다. 그리고 사진기에서 사진이 나오면 피사체가 드러날 때까지 긴장한 채 기다린 후 사진을 유심히 살폈다. 그 과정이 실제로는 꽤 길어 지루한 광경을 더 지켜볼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 그는 남자를 가끔 흘깃 보고는, 하던 대로 소설에 관심을 쏟았다.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시간이었다.

 

 

남자의 모습을 봐서는 밖은 꽤 더운 듯했다. 하기야 7월 초순이 넘어가는 시점이라 사람에 따라서 무더울 수 있었다. 그는 에어컨 세기를 약하게 맞추고 집안 공기를 신선하게 만들었다. 창가 근처에 조그만 탁자를 마련하고 읽을거리를 펼쳐 놓았다. 창문으로는 날카로운 햇살이 스며들어 날씨가 무더워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남자는 여전히 집 앞을 서성였다. 무척 더운지 연신 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남자의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는 땀으로 군데군데 얼룩졌다.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힘들어 보였다. 마치 큰 병을 앓고 막 깨어난 듯이 창백한 모습이었다. 더위를 먹은 모양이로구나, 라고 그는 제멋대로 짐작했다. 그때 그는 지루한 텔레비전 프로를 뒤로 하고 A4용지에 인쇄한 단편소설을 창가 조그만 탁자에서 읽고 있었다. 신경숙과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읽고 다음 작품으로 레이몬드 카버의 〈파인더〉를 선택해서 첫 쪽을 넘기려던 참이었다.

 

그는 파인더의 화자가 양손이 없어 의수에 의지한 사진사에게 커피를 대접하려는 대목에서 다소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흘끔, 밖에서 땀을 닦는 남자를 봤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전문 사진작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사진을 즉석에서 찍어 파는 사람이겠구나, 라고 자연스럽게 단정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굳이 이런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까?’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상상했다.

‘부동산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의 생각에, 그가 사는 전원주택단지는 일산 전원주택 중에서도 꽤 값이 나가는 편이었다. 주위경치, 조깅코스, 인접한 공원 등 정신적으로 사치할 만한 시설들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부동산업자가 사진을 찍고 다닌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소설 〈파인더〉의 사진사처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다. 물론 놀이공원이나 유명 관광지에 가면 종종 만날 수 있지만, 일상적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남자는 도둑이 아닐까?’

우선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사진사가 아니라면 굳이 폴라로이드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단 한 경우, 사진사가 아님에도 꼭 폴라로이드를 가지고 다녀야 할 경우는 남에게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기 싫을 때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왜 보여주기 싫은 것일까?’

결론은 하나, ‘남자는 도둑이다!’라고 그는 다소 악의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에 따르면, 남자는 그가 사는 지역을 염탐하고 도둑질하기 좋은 집을 물색하기 위해 동네를 돌고 있다. 그리고 후보로 선정된 집을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직접 찍는 것이다.

만일 폴라로이드가 아니면 사진관에 맡겨야 하는데, 이는 증인을 하나 더 만드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카메라의 방식도 보안 유지에는 취약했다. 스마트기기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자동으로 자료를 무선 공유하는 설정이라도 해놨으면 그 기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막막하다. 네비게이션 기능을 쓴다고 위치알림기능이라도 해놓았다면, 그야말로 범행준비과정을 생중계하는 꼴이었다. 기기를 제대로 못 다루어 낭패를 보는 코미디 영화 같은 상황이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상상이 이쯤에 이르자 그는 〈파인더〉의 두 번째 쪽을 건성으로 읽고 있었다. 문장은 엉키고 내용은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차츰 인쇄물에 시선이 가는 시간과 남자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시간이 비슷해졌다.

 

남자를 도둑이라고 제멋대로 단정 짓자, 남자가 땀을 심하게 흘리고 얼굴이 창백한 이유, 계속해서 동네를 도는 이유 그리고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가끔 주변을 찍는 이유가 설명됐다. 그는 남자가 초보도둑이라 자신에게 닥친 현안을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때 남자가 그의 집 (아니면 옆집의) 지붕 근처를 향해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것을 목격했다. 왠지 남자가 그의 집을 선택한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남자의 치밀하고 영악한 부도덕성에 분통이 터져 당장이라도 때려눕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때려눕히지 않으면 일주일간은 도둑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상상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뇄다. 그럼에도 자꾸만 의혹의 불길은 커졌다. 이제 그가 남자를 보는 시간은 책을 읽는 시간보다 길어졌다.

 

느리게 진도를 나가던 소설 ‘파인더’에서, 의수를 지닌 사진사가 커피 잔을 어떻게 드는지 소설 속의 화자가 지켜보는 장면에 이르렀다. 그는 정말 소설 속의 화자가 오로지 사진사가 컵을 어떻게 드는지 궁금해서 커피를 권했을까 궁금했다. 그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남자를 살폈다. 남자의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남자는 가끔씩 인상을 찡그리기도 하면서, 동네를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쉰 살이나 된 남자가 민첩하게 도둑질을 저지를 만큼 허술한 동네가 아니었다. 또한 남자가 동네를 털 생각이 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동네를 서성여서 주목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적의 없는 남자의 행동을 악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파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서 치밀하고 영악한 부도덕성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요일은 그에게 신성한 날이었다. 일요일 오전 11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간의 죄악을 고백했다. 그러면 머리가 맑아졌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일요일 오후는 그에게 혼자만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떠나 잠시나마 혼자서 묵상하거나 독서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순간에 이 따위 한심한 상상을 하다니!’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인쇄물에 전력을 기울이려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의 상상 속에서 마음대로 도둑이라고 규정 당한 남자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속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남자가 지금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설 ‘파인더’에서 사진사가 화장실을 가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남자도 화장실을 가고 싶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땀을 심하게 흘리는 걸 볼 때 소변을 볼 필요가 없을 듯했다. 설령 마려웠더라도 주변 상가에 화장실이 허다해 웬만해서는 벌써 볼 일을 마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엉뚱한 상상을 비집고 불쑥 소설 〈파인더〉에서처럼 정말 즉석사진을 파는 사진사가 아닐까 생각하려다가,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단정해버렸다.

‘요즘 세상에…….’


결국 남자가 필요로 하는 걸 알기 위해서는 나가서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가 그를 엉뚱한 사람 취급할 것만 같아 망설였다. 물론 ‘화장실 안 가실래요?’라든지 ‘사진 파실 생각이죠?’라고 느닷없이 묻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저것 주변이야기로 말을 걸겠지만, 이 간단해 보이는 일도 상당한 두뇌노동을 요구한다. 만일 남자가 비사교적인 성격의 인물이라면 두뇌노동은 더욱 가중된다. 이쯤 되자, 갑자기 꼭 속죄를 할 필요가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단지 혼자서 상상했을 뿐이다. 그는 남자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를 바보스럽게 느꼈다.


‘만일 남자는 혼자 있고 싶은데 괜히 끼어드는 것이라면?’

그는 남자가 세 시간 넘게 열중하면서 동네를 서성이는 것은 뭔가 급한 용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가 끼어드는 것은 남자에게 폐가 될 수도 있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마쳐야 하는데, 낯선 자의 시시껄렁한 호의에 일일이 반응해야 할 테니까.

호의도 때와 장소를 잘 맞추지 못하면 변질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다음 역에 내리려는 노인에게 자리를 억지로 양보하거나, 애인끼리 싸우는데 치한에게 위협받는 걸로 착각해서 끼어드는 경우가 그렇다. 얼마 전 선배네 집들이에서 배가 터지도록 먹고 눈치껏 그만 먹으려는데 선배가 자꾸 권하는 바람에 탈이 날 때까지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마도 남자에게 호의를 베풀 때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단정했다.

물론 자신의 추측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모처럼 누리는 일요일 오후의 나른함을 깨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고 판단을 내렸다.

 


오랜 상상 탓에 출출했다. 그래서 남자를 뒤로 한 채 부엌으로 가 라면물을 올리고 원두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켰다. 얼마 후 집안은 원두커피의 진한 그윽함과 라면의 매콤함이 가득했다. 약속이 없는 일요일 오후엔 늘 버릇처럼 준비하는 식단이었다. 라면국물까지 깨끗이 비우고는 원두커피 한 잔을 들었다. 거실 소파까지 걸어가면서 창가 너머로 서성이는 남자를 흘끔 바라보았다. 여전히 남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조작하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고 커피를 홀짝거렸다. 방송에서는 시청률 1위라는 드라마를 재방영하고 있었다. 남녀 주인공은 훌쩍거리며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여전히 여름이 멀었는지 소매가 긴 옷을 입은 채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정열적으로 껴안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일요일의 나른한 오후에 한껏 게을러진 그는 행동 없는 상상을 끝없이 펼칠 뿐이었다.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이었다. 이대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텔레비전에 집중하기 위해 볼륨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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