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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Dec 07. 2023

만화와 실사 캐릭터

산문

어린이들의 그림에서는 보통 사람의 머리가 유독 크다. 2등신이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할 때도 있다. 마찬가지로 얼굴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중도 현실에 비해 높다.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실사에 이 모습을 적용해보면 매우 어색하다 못해 기이할 수도 있을 모습이다. 상상해보라. 2등신에 눈이 얼굴의 상단을 거의 다 차지해버린 채 웃고 있는 모습을. 그러나 이 모습을 다시 만화영화로 전환하면 깜찍한 걸그룹 단원으로 채용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니 어린이들이 자주 보는 만화나 만화영화에서도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은 자주 그런 공식을 지키곤 한다. 이것이 일본 만화 캐릭터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대체로 만화 캐릭터들이 그랬기 때문에 그런지 그도 아니면 아이들이 그러한 경향을 선호해서 그런 캐릭터가 수요에 맞게 창작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두고 싸움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어린이들은 그 현실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귀여워하고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만화 캐릭터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들도 그 안에서 말썽부리고 갈등하다가 사랑도 한다.     

그런데 이상적인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이 지녔다고 믿는 매우 매력적인 감정이면서도 어쩐지 영화 속 멋진 사랑은 현실에서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것은 마치 왜곡된 영상을 볼 때나 드러나는 장면 같다. 만화영화에서 과도하게 얼굴과 눈에 집착했듯 사랑에서도 달달한 부분에 과도하게 집착하기 마련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 달달함이 참으로 마력적이어서 오랜 세월 동안 이것에 대한 찬미는 시들지도 않는다. 즉 만화 캐릭터가 만화 속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수용하기 쉽지 않듯 사랑 역시 그런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없다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럴 수만도 없는 사랑이라는 것이 여전히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사랑의 진부하지만 소중하다는 그 가치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는 힘을 얻는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렇게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모두가 사랑을 하고 사랑에 대한 작은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매우 까다로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끝끝내 또 하고야 마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하여 집중하는 동안 세상은 아름답다.     

다만 집중하여 빠져 있던 순간에만 사랑의 풍선이 그토록 풍만하게 아름다웠을 뿐이다. 그 감정에서 깨어나서 통장 잔액을 바라보고 있자니 종이에 겨우 들러붙어 있던 숫자의 획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너덜너덜해진 1자를 집어 들고 “일이나 할 걸”이라며 후회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괜히 심술이 생겨 ‘1’자로 풍선을 뽁, 터트리기도 한다. 그러면 어디선가 매운 손이 날아와 뺨,

‘팡!’

터진다. 입술이, 귓불이 얼얼하다. 사랑은 비현실적인 감정이지만 아픔은 현실적인 감각이다. 제 몸 아픈 건 다 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리고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을 버리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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