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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Dec 05. 2023

동창회에서 생긴 일

원피스 & 콩트


동창회에 갈까 망설였다. 누구는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학자가 되었고, 누구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방송인이 되었다. 무어 그리 급하다고 벌써 기부 사업을 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기부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기부의 목적이 항상 순수한 것은 아니니까. 어른이 되면 어떤 행동에 대해 순수하게만 보지 않는 탁한 의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 어릴 때와는 달리 아무 사심 없이 친해지는 경우도 드물다.

얼마 전에는 대통령인수위원회에 들어간 동창이 있다는 소식에 모두들 농담처럼 “우리도 이제 기회가 열리는 건가?”라는 말이 돌았다.

중학교 선생님께서 퇴직을 하신다기에, 한 친구가 어렵게 연락처를 수소문해 반 친구들 대부분을 모이게 한 것이다. 강남의 어느 고급 일식집이었다. 남자 역시 어색한 자리에 갈까 망설이다가 그래도 어릴 적 친구들을 보고픈 마음에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함께 동창 모임에 나갔다. 실로 몇 년만인가. 막상 친구들을 보니, 어릴 적 추억을 늘어놓느라 즐거운 느낌도 들고, 동창들은 되도록 지금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초반에 서로 지금 근황이 어떤지 묻는 자리에선 잠깐 어색하였지만, 잘 나가는 친구도 있고 못 나가는 친구도 있고, 저마다 근황보다는 예전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 모임도 있기 마련이었다. 화제는 곧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잠깐이라도 머물 수 있는 모임.

그때였다. 친구들이 근황 소개를 마치고 한 잔쯤 건배를 들고는 선생님이 그동안 학교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듣던 때에, 문이 열렸다. 동네 술자리에 나가듯 추레한 점퍼 하나 걸치고 온 친구는 한때 잘나가던 전교 1등이었다. 서울대 1순위란 별명을 지녔고, 얼굴도 말끔해서 모든 동네 아이들의 표준이 되던 친구였다. 고등학교 때 가족 전체가 사고를 겪어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졌고 동네 소문 때문에 결국에 이사를 했다는 친구. 그 뒤론 소식을 모르던 친구였다. 그를 우리는 1순위로 불렀다. 그 시절이든 지금이든 서울대 1순위의 학생은 대접 받기 마련이고, 부러운 마음, 질시하는 마음으로 그런 별명으로 불러주곤 하였다.

문이 닫힐 때 그의 신발은 작업화 같았다. 어디선가 일을 하다 온 듯하였는데,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솔직한 편이었다. 자신이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 말에 평소라면 혹시 돈을 빌려달라든가, 보험을 들어달라든가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였지만 그의 눈빛을 보면 그냥 순수하게 자신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또 그렇게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을 고백하는 때가 있기도 한데, 그게 오랜 만에 본 동창들과의 자리라는 것이 좀 어색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냥 그의 말은 담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진 후로는 그럭저럭 살았고, 서울대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명문대를 나왔고,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사업을 결심하고 나왔다가 출판 사업을 말아먹은 뒤로는 조금 어렵다는 정도였다. 이제야 막 간신히 발 뻗고 잘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오기가 조금 어색했다고. 그래도 선생님을 꼭 한 번 뵙고 싶었다고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는 “잘 왔다”라면서 친구끼리 그런 게 무슨 문제냐고 하였고, 몇이 그것에 호응하기도 하였다. 선생님도 반갑다면서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다시 모두가 각자 가까운 자리의 동창과 말하는 순간이 왔고, 1순위는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그의 옆에는 요즘 차세대 과학자로 주목받던 동식이가 앉아있었다예전에는 조용하기만 했는데이제는 먼저 친구들을 챙겨주는 모습도 보여주고 말이 조금 많아진 듯했다자리의 특성상 그랬을 수도 있지만. 1순위에게 오래 전 무심코 네가 걔보다는 수학 못 하잖아?”라고 말했다가 1순위가 발끈했던 기억으로만 연결되는 친구가 동식이었다그 에피소드를 그 자리에선 말하지 못했다말하고 싶었지만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때에 1순위가 먼저 웃으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젠 친구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 같다며. 같이 웃었다. 자신이 사업 망한 뒤 고시원에 숨어 있을 때, 그가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기사를 보았는데, 이렇게 어떤 아이들의 세계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고.

“내가 널 친구라고 사람들에게 말해도 되는 건가?”

1순위의 말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며 반문했다. 1순위도 맑게 따라 웃었다. 그런데 어쩐지 1순위가 그를 친구라고 말하고 다니진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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