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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Jan 29. 2024

은유는 더듬거리며 글자를 읽는다

산문 & 콩트

은유는 더듬거리며 글자를 읽는다. 긴 글을 읽기 어렵고, 짧은 글을 읽을 눈은 무선 더듬이 성능이 떨어진다. 그동안 그녀는 자신의 왼쪽 눈이 약한 난시였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그것을 교정할 것인가 질문을 받았을 때, 제안을 거절했다. 어차피 그동안 잘 살았기에 그럴 필욘 없을 듯했다. 생각해보면 잘 살았던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어쩐지 책을 읽을 때 문장이 잘 안 읽혀서 산만해졌고, 그래서 책을 늘 늦게 읽었다. 이러한 습성은 사실, 짧은 시간에 문제를 읽는 시험에서는 크게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수능 때도 그랬을 것이고, 토익 때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백내장 때문에 은유 자신조차 몰랐던 난독의 이유를 조금은 알 듯했다. 은유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알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책을 읽으며 인간의 심리를 탐구한다는 것이 멋쩍게 느껴졌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원고 등을 빠르게 읽지 못해서 늘 시간을 충분히 두고 읽게 된 덕분에 유익한 점도 있다. 한 문장씩 곱씹게 된다고나 할까. 이럴 때 손가락은 퇴화되었으나 오래 전 습관을 조금은 간직한 아날로그 더듬이 역할을 했다. 손가락 자체로는 온전히 글을 읽는 역할을 하지는 못하지만 시선을 돕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다. 눈으로만 읽을 순 없으니 시선은 손가락을 의지한 채 자꾸만 흔들렸고, 그러다 보니 다시 읽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그 덕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행간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건 좋은 점이라고 해두자.

그렇게 의미의 행간에서 건져 올린 다의성 탓일까, 글의 심연을 발견하고 나면 모든 걸 확정하기 어려워진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또 상대성 이론으로 우주의 비밀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고 여겼을 때 뜻밖에 미시세계의 법칙은 양자역학이라는 이질적인 이론, 그것으로 모든 오감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예를 들어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니! 더구나 우리 자신은 여기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니! 말도 안 되게 보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단순명료한 생각보다 심오하게 여겨지지만 그만큼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으므로 극단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은유는 수많은 표현으로 주어를 연결해주는 은유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대일로 명료하게 연결되는 단어 그런 것이 있다면 수학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확고히 규정할 수 있으므로, 명료한 정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학적 탐구를 좋아했다고 해야 할까.

이처럼 기묘한 의미의 바다를 헤엄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이 또 그런 게 아니어서, 종종 그런 불명확함을 즐기기도 한다. 마치 시를 읽으면서 아무런 의미도 따지지도 않고 확정하지도 않으려 했다. 그런 장르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은유의 성향상 그러한 산책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조금씩 불명확함에 질리기 시작할 때면 찜찜한 기분이 들고 피곤해졌다.

아무렇게나 표현하자면 그냥 바다에 오줌을 지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런 표현을 은유가 직접 듣는다면 바로 다음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바다에서 오줌을 지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지리학적 창피함 같은 것일까?”

은유가 혼자서 이렇게 뜬금없이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인터넷 검색창에 ‘바다에서 오줌을 누면’이라고 입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은유는 오줌 눈 바다를 헤쳐 육지로 기어 나오듯, 산문적인 속성을 선호하는 사람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것을 바라보는 옆 사람의 난감함이란! 이런 고백을 할 때면 그때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의 오줌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지리적 고충을 이불에다 그려놓는 경험을 한번쯤은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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