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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Mar 23. 2024

미니픽션

칼럼

[목차: 바깥의 글쓰기]

♬ 인용글 활용: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 탁월한 편집: '국화와 칼'과 교양서적

♬ 인용: 교양서 저술 때 유의 사항

♬ 재즈문화사: 교양서 주제 선택 때 유의 사항

♬ 목차 타이핑: 교양서 집필 때 유의 사항

♬ 인용 표기법: 교양서 집필 때 유의 사항

♬ 지식놀이: 편집인용과 그 사례

♬ 놀이글: 혼융인융과 코멘터리

♬ 르포 일기 수집: 교양서를 쓸 시간이 없다면

♬ 미디어비평: 코멘터리의 종류

♬ 트위터에서 보았던 기법 두 가지

♬ SF: 전자책과 링크 기법

♬ 직장인 창작: 미니픽션과 에피소드

♬ 미니픽션

♬ 에세이, 글쓰기의 멀티플레이어

♬ 상호텍스트성: 링크가 너무 많다는 건

♬ 1인칭 문학: 픽션에세이와 사소설

♬ 매드무비와 팬뮤직: 매쉬업과 리믹스

♬ 성경의 글쓰기 방식





♬ 미니픽션

미니픽션이라는 표현은 현재 ‘짧은 산문’, ‘엽편소설’, ‘손바닥소설’, ‘한뼘소설’, ‘핵편소설’, ‘초미니소설’ 등 다양한 표현으로 난립한다. 이야기의 핵심만을 추려 극도로 압축하여 표현하는 장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엄연히 시의 운문과는 다르지만 때론 시적인 면까지 띠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구별이 힘들 때도 있다. 가끔은 이게 무슨 장르적 효용이 있을까 싶기도 한데, 하이쿠가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짧은 이야기를 즐긴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조직하는 것이 좋을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도 생길 만하다. 개인적으로 기사 문장으로 고민하고 곱씹는 것을 좋아하곤 했었는데, 어떤 문장이든 그 장르만의 문장 맛이 있을 테니, 이 역시 그런 관점에서 생산적인 측면을 발견하고 추출하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남미에서 시작된 미니픽션에는 기실 메모 등을 통해 장편소설의 문체를 점검하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메모에는 짧은 경구의 색채를 띠는 문장도 많다. 경구적이지 않더라도 짧은 문장 하나와 여백만으로 모든 것을 대변할 때도 있다. 이것을 굳이 메모나 산문시와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모호하기도 하다.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작품 하나 읽어보자.

깨어나 보니, 공룡은 아직도 저기에 있었다.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공룡>이란 미니픽션으로, 처음에 읽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여기서 여백이 작품의 중요한 한 요소라고 한다. 여백이 꽤 길다고 하는데, 여기선 조금 줄였다. 어떤 부조리한 상황이 막막하게 펼쳐진 느낌이랄까. 어찌 보면 솔직히, 시 같다. 미니픽션이 단순히 에피소드와는 다른 면모를 여기서 확실히 보여준다. 미니픽션을 진지하게 다룬다면, 산문적 형태와 운문적 가능성이 중첩될 수도 있다. 다만 이 장르를 오랫동안 다루어 보지는 않아서  이 장르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저 아주 1차원적인 수준에서만 상상할 뿐이다. 언젠가 이 장르가 정착되는 경우라도 생긴다면, 미니픽션 작가들이 그런 생각을 본격적으로 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어쩌면 장르의 미래가 그냥, 휙 증발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로선 모를 일이다.    

  

그저 여기서는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맞물린 공원’, 카프카의 ‘산초판자의 진실’ 등을 읽어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네이버에서는 카프카의 산문소품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917년 집필, 1931년 『만리장성의 축조』에 수록. 이 짧은 텍스트는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정도면 그냥 메모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할 필욘 없을 것 같은데, 과연 이런 방식으로도 촌철살인의 압도적 힘을 보여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깊이보다는 발상의 전환 등, 광고 카피와도 유사한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가 하면 헤밍웨이가 동료 작가들과 술을 마시다가 ‘가능한 한 적은 단어로 소설 짓는’ 게임을 하면서 제시한 문구도 있다. 소문의 결과를 소개하자면 결과는 헤밍웨이의 승리였다고 한다. 단 6단어로 평정해버렸다고도 하는데, 항간에는 이러한 유래 자체가 가짜뉴스라고 한다. 어쨌든 문제의 작품을 소개하겠다. 개인적으로는 매력적인 작품이라 헤밍웨이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미니픽션이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단 한 번도 신지 않았음.)


또한 하이쿠처럼 한 문장짜리 전통시가 있는가 하면, 문학성보다는 지시정보성을 강조한 광고문구가 있다. 과연 이 틈새를 파고들만한 것이 있을까? 그냥 솔직히 혼재해서 생각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짧은 문장으로 사유하려는 사람들이 이름만 달리 붙인 결과물이라고 해도 괜찮다.   

  

이런 결과물, 우리에게도 있다. 에피소드라고 해도 좋고, 미니픽션이라고 해도 좋고, 그냥 떠도는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그런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있다. 그냥 떠돌던 이야기로, 이토록 훌륭하게 슬픈 이야기도 드물 것 같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학생이 있었다. 기말고사 시험 공부하느라 새벽까지 교과서를 펼치고 있는데 뒤가 싸한 느낌이 있어 그 기분을 없애려고 일부러 뒤를 돌아봤다. 그랬더니 창문에 한 여자가 거꾸로 매달린 듯한 모습으로 산발을 아래로 늘어뜨리고는 학생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눈이 딱 마주치고는 비명을 지르며 힘겹게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없었다.
다음날 알고 보니 그때 그 순간에 전교1등 여학생이 성적 비관으로 투신자살했고, 그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 학생은 화단에 떨어져 죽었다.   

 

이건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납량특집으로 엽서를 모집했고, 그때 1등을 했던 이야기다. 물론 모두가 아는 떠도는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한국현대의 공포미니픽션 중 최고가 아닐까 한다. 공포 미니픽션이면서 세태 미니픽션이었다. 그 사건의 발단에는 여러 일화가 붙을 수 있어 현대 도시의 강박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때 라디오 듣는데, 많은 이들이 소름 돋았다고 한다. 나 역시 나중에 이 녹음을 들었는데, 정말, 소름 돋았다. 너무 짤막하고 굵직해서.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미니픽션도 있다.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는 괴담이다.

직사각형의 체육관에서 네 명의 학생이 밤을 샌다. 그런데 자면 (얼어 죽어서) 안 되는 상황이었는지 일정 간격을 두고 서로를 깨우려고 각각 체육관 네 귀퉁이에 앉아서 10분마다 한명이 다른 하나를 툭 치면서 그 상대의 자리를 차고 들어간다. 그러면 맞은 이는 움직여서 자기가 치기로 한 이를 치고 그 자리에 앉는다. 그런 식으로 서로를 깨우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잘 견딘 뒤 아침이 되어서야 그곳을 나왔다.
그러고는 그 말을 경비실 아저씨에게 말했는데, 경비실 아저씨가 궁금해서는 되물었다.
“한 명은 어디에 있지?”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4명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계속 순환하려면 5명이 필요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이 역시 모두가 아는 이야기일 듯하다. 4귀퉁이라서 4명과 딱 아귀가 맞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그 사이에 공포가 스며든다. 마지막 사람이 돌아서 처음 움직인 사람 자리, 즉 비어 있어야 할 자리로 들어갈 때 누군가를 쳤다면, 그는 일원이 아닌 누군가였다.


이 괴담이 일본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다 보니, 달걀귀신 이야기도 떠오른다.

달걀귀신은 원래 얼굴이 없는 아기 귀신이다. 그래서 달걀 같은 얼굴이라고 달걀귀신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가난하던 시절, 이름 없이 죽어야 했기에, 얼굴이 없던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들, 부잣집 앞에 버려진 뒤로, 나이가 들어버리면, 부모로서도 성년의 자식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됨으로써 달걀 같은 얼굴로만 남은 아이들이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기 떄문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이런 아이들에 대한 흔적이 스며 들어 달걀귀신 이야기가 나온 것은 아닐까?

지금은 아무래도, 애처로운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이런 단어가 쓰인다. 트위터에 보면 달걀귀신들이 있는데, 한때는 트위터 좀비로 불리며 악성 댓글 달던 존재들을 달걀 귀신이라고도 불렀다. 때로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트위터 계정들이 잔뜩 있는지 몰라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달걀귀신들이죠.

여기선 SNS 달걀귀신을 욕하려는 것이 본 의도는 아니다. 그저, 어떤 떠도는 인식과 말들로 미니픽션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말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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