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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Dec 21. 2023

모나미: 볼펜 똥 / 애매함

산문 & 콩트

♬ 모나미 볼펜 똥

모나미. 가장 실용적인 볼펜이면서 언제나 내 손에 작은 상흔처럼 잉크를 진하게 묻히는 모나미. 모난 아름다움, 모나미. 모나리자, 이쯤 되면 리자는 미자와 숙자와 같은 이름처럼 들린다.

이자가 붙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모나의 아름다움이란 자꾸만 덧붙는 이자가 아닐까 한다. 볼펜똥 같은 것. 어쩌면 볼펜똥 그 자체. 모나미의 핵심은 역시 볼펜똥이 아닐까 싶다. 그래, 그것이야말로 모나미다. 오래 쓰다 보면 반드시 내 손에 묻고야 마는 상흔, 동료애, 서로의 멱살을 부여잡고 아웅다웅 하다 코피라도 터지듯. 그러면 닦아야 한다. 어쨌든.

휴지를 뜯어 볼펜심의 끝을 닦으며 다시금 볼펜으로 쓴다. 종이의 여백에 몰래 슥슥 문대듯 볼펜 끝으로 닦아가며 볼펜 똥의 흔적을 남긴다. 어느덧 필기하려는 목적과 볼펜 똥을 닦으려는 목적이 동시에 공존하는 종이가 되고 만다. 그건 모나미의 슬픈 미덕일 수도 있다. 싼 게 비지떡이라 욕하면서, 쓰다가 잃어버려도, 누군가 무의식중에 가져가도, 실수로 놓고 와도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꽤 요긴하게 쓰게 되는, 그런 볼펜, 모나미.

 




♬ 모나미의 애매함

볼펜과 연필과 지우개는 소유의 관점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다. 분명 그것을 사용하는 소유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일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잠시 빌리거나 무의식중에 남의 것을 들고는 서류를 잠시 작성한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의 손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볼펜, 연필, 지우개 등이 들려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신비롭게도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에 소유자가 시시콜콜 자신의 물건을 챙기기도 애매하다. 시점을 놓치면 굳이 따라붙어서 그것을 달라고 말하자니 멋쩍다. 때로는 집에 와서 보니 없어진 뒤라 누구의 동선을 따라 실종되었는지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모나미 유의 싼 학용품이 좋다. 잔뜩 사놓고 쓰다 보면 다 쓰기도 전에 다 사라지곤 하지만.





♬ 모나미

“모나미 볼펜요. 파란색, 빨간색 한 타씩 주세요.”

어째서 한 타는 12자루가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늘 그런 궁금증은 일지만 누구도 속 시원히 답해주지 않아서, 그냥 관례적으로 볼펜을 한 타씩 살 때면 실없이 떠오르는 질문이었다.

‘2자루는 덤이었을까?’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추임새. 진우는 한 자루를 덤으로 주기엔 정 없으니까 두 자루를 덤으로 준 것이라 생각한다. 연필 값이 쌌을 때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1950년대쯤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정이 많았을 것이라 고정관념에 한껏 기대본다. 그런 근거 없는 상상에 합의한다면 좀 더 나아가 보자. 그때 누군가 두 자루씩 주는 것을 불합리하게 여겼고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여 결국엔 모든 자루에 값을 매기고 한 타 자체를 12자루로 확정해버렸던 것이 아닐까.

물론, 진우로서는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모나미 볼펜을 사러 왔을 뿐이니까.

모나미 볼펜은 늘 다 쓰기 전에 언제 없어진 줄도 모른 채로 사라진다. 그렇게 은유의 필통에도, 환희의 필통에도, 가끔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급생 필통에도 종종 모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이 진우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때로는 볼펜 똥이 묻어있는 위치를 보고 자신의 것으로 짐작하곤 한다. 그러나 그리 개의치 않는다. 만일 그것이 상대적으로 비싼 펜이었다면 그렇게 의연하게 대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잃어버린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학용품의 실종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라면 역추적도 가능하여, 기어이 모른 척 다른 것을 빌리는 척하면서 볼펜이 거기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발견한 것처럼 연기할 때도 있다. 실패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는 학용품 가격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어서 비싼 볼펜이라면 솔직하게 말하는 한이 있어도 그걸 되돌려 받고 만다.

이러한 고충은 비단 볼펜에만 관련된 일도 아니다. 볼펜과 연필과 지우개는 소유의 관점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다. 분명 그것을 사용하는 소유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일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잠시 빌리거나 무의식중에 남의 것을 들고는 공책에 필기를 한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의 손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볼펜, 연필, 지우개 등이 들려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신비롭게도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에 소유자가 시시콜콜 자신의 물건을 챙기기도 애매하다. 시점을 놓치면 굳이 따라붙어서 그것을 달라고 말하자니 멋쩍다. 때로는 집에 와서 보니 없어진 뒤라 누구의 동선을 따라 실종되었는지도 알기 어렵다. 연극을 할 수 있는 것도 기민하게 볼펜의 상황을 점검할 때라야 가능한 것이고, 비싼 학용품일수록 연기는 정교해진다. 이런 거짓의 기교가 싫다면 가급적 자신이 감당할 만한 학용품을 써야 한다. 모나미만으로도 연극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압박감은 크지 않다. 만일 비싼 독일제 학용품이라고 하면 그 스산하고도 저며오는 아픔을 자연스럽게 연기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것을 되찾으려는 간절함 같은 것. 아주 자연스럽게 알아차린 것처럼 연극하는 건 처세의 효과적인 기술인 셈이다. 간절함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할 시시콜콜한 면모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기가 진정으로 시시콜콜해지기 위해서는 모나미 유의 싼 학용품이 좋다. 잔뜩 사놓고 쓰다 보면 다 쓰기도 전에 다 사라지곤 하는 학용품, 그래도 마음속에서 원망이 싹트지 않는 학용품, 모나미.

모나미는 가장 실용적인 볼펜이면서 언제나 내 손에 작은 상흔처럼 잉크를 진하게 묻혀준다. 모나미는 모난 아름다움이며, 모나미는 모나리자다. 이쯤 되면 ‘리자’는 미자와 숙자와 같은 이름처럼 들린다.

‘이자’가 붙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모나의 아름다움이란 자꾸만 덧붙는 이자가 아닐까 한다. 볼펜똥 같은 것. 어쩌면 볼펜똥 그 자체. 사람도 똥을 싸는데, 볼펜이라고 똥을 싸지 말란 법도 없다. 모나미의 핵심은 역시 볼펜똥이 아닐까 싶다. 그래, 그것이야말로 모나미다. 오래 쓰다 보면 반드시 손에 묻고야 마는 상흔, 동료애, 서로의 멱살을 부여잡고 아웅다웅 하다 코피라도 터지듯 볼펜 똥와 손에 묻는다. 그러면 닦아야 한다. 어느덧 필기하려는 목적과 볼펜 똥을 닦으려는 목적이 동시에 공존하는 종이가 되고 만다. 그건 모나미의 슬픈 미덕일 수도 있다. 쓰다가 잃어버려도, 누군가 무의식중에 가져가도, 실수로 놓고 와도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꽤 요긴하게 쓰게 되는, 그런 볼펜, 모나미.

진우는 모나미 두 타를 책상에 넣고는 마지막 남은 파란 모나미로 공책에 필기를 한다. 오래도록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에게 남아있어 준 그 모나미가 고맙다. 똥의 존재는 어쩌면 그러한 영광스러운 우정의 표식일 것이다. 진우는 휴지를 뜯어 볼펜심의 끝을 닦으며 다시금 볼펜으로 무언가를 쓴다. 종이의 여백에 몰래 슥슥 문대듯 볼펜 끝을 닦아가며 볼펜 똥의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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