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글 & 조선풍속화
“뱀의 머리가 되지 말고 용의 꼬리가 돼라.” 이런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이 말을 나쁘게도 좋게도 생각하지 않죠.
"심지어 너는 혼자 다니는구나. 나같은 호랑이도 아니면서, 혼자 다니고 뱀의 머리도 아니면 급살맞기 딱 좋다. 독고다이, 사자성어도 모르느냐? 혼자 고(go)를 부르면 죽는다(die)는 뜻이니라."
다만 ‘시작’이 많은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재미없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를 들어가는 순간,
(각자 노력에 따라 달라지더라도) 웬만큼 그 사람의 미래가 정해지기 마련이죠. 고3때 세월을 허송하는 것과 군대 가기 전에 세월을 허송하는 것은 다릅니다. 모두가 집중해야 할 때가 있고 그건 시스템이 획일화되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인재를 효율적으로 뽑기 위해 어떤 시기에만 비교적 몇 가지의 유형으로만 등용문이 열려 있는 셈입니다. 이를 꼭 비관적으로만 볼 일은 아닙니다.
어떤 사회라도 안정된 사회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합의가 있고
"아무리 그래도 백지를 낸 사람을 도전적이고 창의적이라고, 행정고시에 합격시켜줄 수는 없잖아요?"
사회로 향하는 방법도 좁혀지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그 형식적 절차와 시기만으로 미래가 불가역적인 수준으로 장벽이 높다면
"아오, 어차피 난 안 돼. 그때 시기를 놓쳤어. 남들 평범하게 살 때 대차게 사업도 한 번 말아먹었고. 남들처럼 그냥 순리대로 사는 건데. 그런 걸 어른스럽다고 하지."
그 사회는 답답한 사회일 것입니다. 이것의 최고조였던 신분제 사회에선
"너는 네가 싫어도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느니라. 넌 그렇게 태어났어. 애석하게도."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 운명이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란
"독박육아가 웬 말이냐! 시정하라! 육아재택은 무슨 말밥이냐! 시정하라!"
‘시작’의 중요도를 낮추어가는 노력이 지속되는 사회일 것입니다.
"아저씨는 하청업체 만년부장. 저는 국내 1대기업의 전도유망한 대리. 잘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하지만 대개는 첫 직장을 어디로 구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많은 것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아들아, 딸꾹. 진짜 너는 지방대, 중소기업으로 돌아서 돌아 신분 상승할 것을 생각지도 마라. 너무 고되고 확률도 낮단다. 그리고 서울에 집사려고 하는 건 포기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예, 아버지, 저는 비트코인을 해요. 한 번 망하지 두 번 망하겠어요?"
그래서 과거 대학 때 교수님은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대학을 제대로 잡고, 역시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일정 수준이 되는 직장을 잡으라는 조언을 했었습니다.
"이사님, 저희도 같이 먹고 삽시다. 제가 마시고 싶어서 그런데 좋은 바 하나 알아두었습죠."
"요즘 이러면 안 되는데..."
그것으로부터 그 사람의 가치가 어느 정도 결정되고 시작한다는 것이었죠. 일종의 점수 계급이 형성되는 셈일까요?
"자네는 몇 기인가? 아, 아, K일보 출신이었구먼. 대학은? 요즘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마는, 그래도 고민 털어놓을 때는 선후배만한 게 없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요즘이라면 지방지로 출발한 기자도 중앙지에 입사할 순 있지만, 여전히 성골 출신이었던 중앙지 출신 기자와 눈에 보이지 않는 처우 문제로 여러 싸움을 해야 한다고도 하죠.
그럴 바엔 시작이 늦더라도 시작을 제대로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대개 한국사회에서 한 사회인의 운명은 20세와 27세 전후로 해서 결정된다고 봐야겠죠.
"사실 20세인 사람이 27세가 되고, 27세인 사람이 50세가 되고 그런 것 아니겠나? 순리대로 살면 이사도 되고 그러는 것이겠지. 사장을 바란다고? 이 사람 꿈이 클세그려. 밖에서 하면 조금 수월할 수도 있겠지. 대신 망하면 40세 때 바닥일세그려. 그때는 서울대고 뭐고 가릴 것 없이 평등하지. 서울대 나온 백수나 그냥 백수나 3개월만 지나면 순수백수거든. 이 사회가 참으로 공평하지."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30살 초반에 한 번 더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기도 합니다. 일부에게만 해당되죠. MBA와 로스쿨 같은 것은 이미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공평한 기회라고 하긴 어렵죠.
‘이무기에서 용으로 신화적 진화를 한다’는 상상력, 흔한 말로 표현해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는 가능성을 외면하는 사회에선
"저는 날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냥 광부의 착한 신부가 되기로 했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마음 아프지만, 그게 순리 아니겠냐? 너무 마음 고생 하지 마라."
결국 과학적 진화에 따라서 뱀과 용은 태생부터 다른 곳에 놓입니다. 과학적 진화라 하니 언뜻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합리성을 수용한다고 해도, 그런 논리대로라면 용은 상상의 동물이므로 없어야 마땅하지만 또 세상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세를 어찌 또 올린다고 하시오? 우리가 열심히 살아서 그렇게 된 것을 어찌 이런단 말씀이오? 우리도 너무 힘드오. 흑흑흑. 용의 눈물은 이토록 진하고 깊소!"
용처럼 행세하려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용을 위한 맞춤형 신화적 상상만큼은 허용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죠.
금수저 한국의 지형도입니다.
자본주의의 성과주의에 집착하는 병폐를 완화하기 위해 ‘결과보다’ 과정을 강조하려는 쉽지 않은 시도만큼이나, ‘끝보다’ 시작의 병폐를 지적하는 시선도 중요하죠. 실패를 하더라도 언제든 재기할 수 있을 회생 절차가 다양해야 할 뿐 아니라,
"쓰러지지 마세요. 마흔이면 아직 한창입니다. 빈털터리라도 다시 취직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어요. 당신의 도전은 뭉개졌지만, 그래도 죽지는 마세요. 그런 실패로 당신의 삶이 의미 없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문화적으로 옭아매며 역할을 한정하려는 관습도 희미해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험이 없는 사회가 되겠죠.
검증된 것에 안주하며 특정한 판단 체계에만 옭아매여 스스로를 착취하고,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인간성과 창의성을 논하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내가 인성이 안 좋지만, 어쨌든 넌 나에게 인성을 좋게 보이는 노하우를 배우게 될 거야."
인성 사교육, 창의력을 위한 10가지 법칙 같은 것을 대치동에서 배우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