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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Jun 29. 2024

반지성과 미래적인 사유

인식과 추론(83~84F)

글쓰기 외전: 인식과 추론


◑ 전체 원고 콘셉트 및 진도 상황 

- 매거진 방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다양한 저자를 섭외하지는 않고 단독으로 작업하였습니다. 매거진에서 다양한 글에 다양한 필자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다중 정체성의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고흐 이미지를 배치하고 여러 스타일의 글과 함께 구성하였습니다. 픽션 매거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매거진 놀이로도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원고의 경우 전체 흐름에선 사실과 경험을 토대로 하되 종종 일관된 방향성을 띠되 원활한 개진을 위하여 허구적 설정을 삽입하였습니다. 대체로 경험적 정보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 총 173프레임으로, 상황에 따라 약간 바뀔 수 있습니다. 현 발행글은 83~84프레임에 해당합니다.






◑ 생각 노트: 반지성과 미래적인 사유

반지성은 생각하는 훈련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기력하고 순응적으로 체제의 가치를 수용하는 지점에서 출현한다. 그나마 그 체제의 가치가 올바르다면 지성적인 교양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열악한 지점을 파고들어 자신의 권력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위세를 떨친다면 표면적인 지성적 교양은 금세 반지성으로 변질된다. 

때로는 자신의 빈약한 상황을 스스로 위로하고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서, 입체적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피해를 본다는 열패감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면서, 또는 자신의 폭력성을 변명하듯 희생양과 가짜 악마를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고 상대에게 증오를 발산한다. 이를 위해 궤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모든 바탕은 사실 수동적이고 무지한 데서 비롯된다. 비판할 능력은 없지만, 그냥 싫다 보니, 비판적으로 추론하거나 상상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으로 정해놓은 답을 위해 지성의 방향을 외면한다. 그러한 반지성적 행태를 위로하고, 자신이 옳다고 말해주는 사람에게 취약해진다.

그렇다고 올바른 지성을 들이대며 '모르면 외워'라고 하면, 그렇게 억지로 그것을 수용하더라도, 그 사람은 언제든 다른 데서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경직된 교양인으로 어정쩡하게 남는다. 결국엔 실수를 해서 반지성을 헛돌더라도, 스스로 교정할 수 있도록 피드백하면서, 결국에는 지성의 자장 안에 들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것에 이르기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운이 좋아 그 지점에 우연히 이른다면 그건 미래적인 사유가 된다. 물론 건강하지 못한 사유를 하는 상태에서 뜻밖에 놀라운 도약이라는 반전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은 내면이 취약하여 생긴 비뚤어진 생각의 병부터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쉽게도 '모르면 외우는' 어정쩡한 위험 상태에도 이르지 못한 채, 반지성의 위안 속에 파묻혀 서로의 부조리를 격려한다. 네가 옳다며. 비인간 경쟁 교육의 씁쓸한 성과인 셈이다. 

물론 이건 언제든 강렬한 경험 때문에 정지되곤 하는데, 운동권 세대는 독재의 강렬한 부조리를 맞닥뜨리고 당장 내 지인이 고문 받아 반병신이 되는 걸 목도하다 보니, 교육의 부정적 영향력이 급속도로 줄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로 인해 생긴 나쁜 사유 습관을 개선해본 적은 없다. 그런 점에서 행동은 직접적으로 당면한 강렬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지만, 미처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게 교정되지 않은 사고 습관은 조용히 퍼져서는, 별 문제 없는 것으로 판정된 채 방치되었던 오랜 세월을 지나서, 이제는 내면화된 고약함으로 우리 앞에 드러나고 있다. 부조리의 극한적 경험으로 봉인되었던 교육의 영향력이 후대에서는 족쇄 없이.

지성인부터 반지성인까지 특별히 경계를 두지 않고 전 방위적으로 퍼진 유령 같은 병이다. 그나마 나은 분야가 있을 뿐 기본은 다르지 않다.

아이히만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책 한 권 읽지 않고 추론해내는 것이 훨씬 뜻 깊고, 그래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기 어렵기 때문에 그걸 하기 위해 아렌트의 도움을 받는 것이어야 하는데, 아렌트의 주장을 필기해서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답으로만 여긴다. 답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답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된다. 

답은 추론해내는 것이고 지워나가는 것이어야 하며, 그럼에도 지워져서는 안 되는 어떤 끝없는 유동성에 잠정적으로 합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과거의 이야기를 받아서 미래로 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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