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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Jun 13. 2024

세 가지 유형의 실패

콜라주 & 빌드업

※ 콜라주 재료 (일부 게재되었거나, 게재 예정)
→ [삼행시]추버라 눈사람 
→ [삼행시]아군도 적군도 없는 사거리 한복판에서 
→ [삼행시]내일도 출사표를 던지기 위하여 
→ [삼행시]지루하게 누워 있어도 되는 그런 계절은 
→ [삼행시]끼니부터 때우자 





→ 나, 욘지은

정말로 끈질기려면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고 하죠? 그런데 더 정확히 보면 실패도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우선 무조건 실패하는 것에서도 단련하는 경험을 하지만 그때는 으레 그런 것이라 여길 수 있어요. 

오히려 성공이라는 희망을 확신할 때 여전히, 뜻밖으로 실패했을 때 그걸 견디는 것이 고역일지도 몰라요. 그때 타격이 클 수 있거든요. 희망은 때때로 독이 되기도 하죠.

또는 화려하게 성공한 뒤 확실하게 실패하는 것도요. 모두 다 결이 다르죠. 





끝없이 광야를 걷는 것 같은 연속적인 실패는 인내를 키우게 하고, 이제는 탈출이란 희망을 저버리는 뜻밖의 실패에선 당혹스러운 절망을 이겨내려는 집념이나 그것마저 넘어서는 초연함을 배워요. 그럼에도 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해야겠죠. 그런가 하면 성공한 뒤 화끈하게 추락할 때는 겸손함을 배우게 되고요. 

그 어느 것도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지만, 결국엔 성공이란 자극에 따라 결이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죠. 



“예전에는 백수가 할 일이 없어 밤에도 산책한다고 하던데, 이제는 건강을 관리하는 성공한 사람의 자세를 운운하더군요.”





대개 많은 실패는 그렇게 성심껏 나뉘지 않거든요. 스스로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남들이라고 그런 실패에 관심을 둘 리도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실패에서 너무 열정적으로 배우려 한다거나 지나치게 성공에 얽매이면 쉽게 지치고 말죠. 그래서 자포자기하게 되기도 하죠. 그래서 무덤덤한 게 좋은 덕목인 듯해요.


그냥 일상의 일을 소화하듯이, 똑같이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끈질기려고 하고, 실패에서 버티려는 순간도 종종 있어야 하겠지만, 항상 기억하고 열망하면 몸이 피곤해지니까요. 






“실패만 써놓은 이 사람 대체 뭐죠? 전염되는 것 같네그려.”


생각해보면 언젠가부터 실패의 순간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실패의 운을 하찮게 낭비하듯 써버리고, 성공의 운만 남기려는 의식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당차게 희망과 성공의 이야기를 기도하기도 했었죠. 출사표를 던지듯이요. 그런데 꼭 안 풀리려고 하는지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 것을 알게 되었죠. 실력을 키워야 하듯이요. 운까지 따라주지 않았고요. 





한풀이 할 사람 없고, 잔소리할 사람들은 주변에 깔렸었죠. 마치 오전에는 의욕에 차 있다가 금세 업무 때문에 탈진한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하염없이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에 빠져들곤 했죠. 방전되었다고 하죠. 때로는 그 느낌에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은 채로 속상해서 잠이 들기도 했었답니다. 그래도 내일 아침에는 출사표를 던지기 마련이었어요. 

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었고, 광야를 걷는 기분이 들었죠.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네.”





이제 정말 성공할 것 같은 느낌, 활로가 뚫린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실패를 했을 때는 가장 암담한 기분이 들곤 하였죠. 어렵사리 공연에 서게 되고, 버스킹을 하였지만, 내 노래를 듣는 관객이 아무도 없을 때 부풀었던 마음은 가라앉고, 눈물만 났답니다. 


허무한 느낌을 숨긴 채 지칠 때까지 버스킹을 했지만, 딱히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탈진한 채로 정리한 악기를 들고, 미끌거리는 눈길을 걸었답니다. 입가에서 하얀 김이 흩날리고, 신발 밑창으로 뽀드득 눈 밟힐 때의 느낌으로만 오래도록 기억되었죠. 그때 자빠지던 순간이 잊히지도 않아요. 






지하철을 탔는데, 하필 정신을 딴 데 두었는지 반대 방향으로 탔던 거였어요. 건대 입구역에서 강변역까지 두 정거장이나 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어요. 원래는 한양대역으로 가려면 반대 방향이었거든요. 다시 거슬러가려면 다섯 정거장을 가야 했죠. 원래는 세 정거장이면 충분했는데 말이죠. 

그러고 나니 어쩐지 퍼져서는 끼니부터 때우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늘 힘들 때엔 원하던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을 듯했죠. 그때 원룸에서 난방비 아껴가며 이불 뒤집어쓰고, 공연 없는 나날을 버텼답니다. 방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아시죠? (웃음)



“이번 정부에서 난방비 많이 나오게… 얼어 죽겠네.”





그러다 보니 성공의 기운이 확실히 스몄다고 느꼈을 때 어쩐지 기존의 고집을 놓치고 시류와 쉽게 타협하려는 유혹도 생기더군요. 예를 들어 이런 거죠. 

돈을 벌어서 차를 샀는데, 신호등을 재빠르게 통과하면 목표점에 도달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앞에 달리는 차의 리듬에 맡겨서는 신호가 끊기기 전에 사거리를 지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판단 착오였어요. 제대로 물린 거죠. 사거리 한복판에서 딱 서버린 거죠. 사방에서 교통 흐름을 딱 막아서는 절묘한 지점에서 서버린 거예요. 앞에서도 차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고요.






“아, 진짜, 미치겠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고.”


그다음 상황은 뻔하죠. 버스며, 자가용이 몰려오다가 크락션을 눌러대고, 뭐, 난리도 아니었어요. 결국 앞 차가 넘어갈 때까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모른 척하였죠. 어설픈 성공이란 요란한 법이었어요. 적들도 많아지고 바늘방석에 있게 되고, 자칫 하면 사고도 날 수 있고요. 딱 사진 찍혀서 범칙금도 물어야 했죠. 사고도 났으면 아찔할 뻔했죠. 다된 밥에 코 빠트리는 느낌이랄까요. 너무 쉽게 급하게 가려다가 큰 일 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럴 때일수록 천천히 가야 할 것 같은데 신호등이 바뀌면 언제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앞차를 좇게 되는 마음, 그러다 실패로 화끈하게 추락하기도 하지만, 쉽사리 멈추지 못했답니다. 그래도 그렇게 추락하더라도 성공의 기억이 남았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다시 건너가지 못한다 해도요. 

그러다 운 좋게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그곳으로 넘어갈 수도 있고요. 제게 경쟁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어요.


야, 거기서 알박기 하고 뭐해! 빨리 안 가!





→ 나, 욘지은
“지금도 그러고 싶냐고요? 오래 산책하는 것 같은, 가늘고 길게, 무덤덤하게 호흡하기, 오다가 떡볶이에 오뎅 먹기,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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