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과 추론(125~127F)
글쓰기 외전: 인식과 추론
◑ 전체 원고 콘셉트 및 진도 상황
- 매거진 방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다양한 저자를 섭외하지는 않고 단독으로 작업하였습니다. 매거진에서 다양한 글에 다양한 필자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다중 정체성의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고흐 이미지를 배치하고 여러 스타일의 글과 함께 구성하였습니다. 픽션 매거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매거진 놀이로도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원고의 경우 전체 흐름에선 사실과 경험을 토대로 하되 종종 일관된 방향성을 띠되 원활한 개진을 위하여 허구적 설정을 삽입하였습니다. 대체로 경험적 정보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 총 173프레임으로, 상황에 따라 약간 바뀔 수 있습니다. 현 발행글은 125~127프레임에 해당합니다.
◑ 생각 노트: 인식의 삼각뿔
지점을 나눌 때, 또는 특정 명제에 대해 관점을 부여하여 해석된 문장을 보여주려 할 때 활용하곤 했다. 예를 들어 ‘나’를 지점으로 찍었다면 ‘너’를 찍고 선을 긋는다. 그 중간점으로 ‘우리’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편이다. 학생인 ‘나’ ‘너’를 동시에 비판하거나 위상을 전환하게 하는 요소로 ‘그들’이 삼각형의 한 꼭지에 찍힐 수 있다. 이는 정반합의 개념까지는 아니다. ‘나’와 ‘너’의 잘못된 점을 버리고 ‘그들’로 진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으로는 나와 너가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나와 너의 시선으로 보면 그들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 그렇게 상호 비판적이면서 상호 결손적인 면이 있다. 그렇게 상호 균형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 지점과 상호 균형을 이루면서 3개의 삼각형을 추가하는 하나의 꼭짓점이 추가된다. 이를 ‘선생님’이라는 지점으로 두자. 이것으로 ‘교육의 방향’이란 문구를 해석해 보자.
‘교육의 방향은 나의 발전을 위한 교육이면서 너를 향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의 협동을 위한 교육이어야 하는데, 그들을 배제하면 안 되는 것이 교육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선생님이 학생들과 적절히 교감하며 더 나은 상태로 이끌어야 한다. 때로는 선생님이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교육의 역방향은 경쟁심에 사로잡혀 나를 죽이고 너를 죽이고 급기야 우리를 붕괴시키면서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선생님은 낙오자인 그들을 비난하고, 우리가 경쟁하도록 다그침으로써 스스로도 교육자로서의 위상에서 소외된다.’
다른 예를 더 들어보자.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를 해석하려다 보니,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채울 수도 있지만, 인식의 삼각뿔로 정리해볼 수도 있다.
우선 밑면의 삼각형에서 3개의 점에 보수, 진보, 페미니즘을 위치시킨다. 보수와 진보로 선을 긋고 중도가 그 선 위에 중간점을 찍은 게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 역사였는데, 최근에 페미니즘이라는 점이 도드라지게 찍혔다. 20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진행된 여성운동사에서 이번에 새로운 한 줄을 추가하는 것이겠다. 어쨌든 그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으로 진보였던 진영 역시 윤리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보수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한국 정치에서 윤리적 명분이 손상되었을 때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쪽은 진보 진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진보 진영에서도 페미니즘이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잃는 것이라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우파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페미니즘이 하나 추가되면서 전통적인 보수, 진보 담론에 균열이 생긴다. 그런데 이러한 밑면 삼각형 위에 각뿔점으로 ‘기후’를 추가해 보자. 그러면 3개의 삼각형이 추가된다. 기후 문제의 측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이나 보수나 진보나 인간의 번영 위에서 전제되고 그것은 곧 지구의 착취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한계가 되므로 모두가 인류의 장기적 번영을 위해서는 일정 부분 기후 문제에 헌신해야 한다. 그러나 기후 문제로 제3세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사다리를 걷어차는 명분이 된다는 점에서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페미니즘으로서도 기후 문제로 풍요의 통제가 있을 때 제일 먼저 타격 받는 계층이 여성과 사회적 약자라는 점을 짚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관점에서 ‘신은 죽었다’를 바라보자. ‘종교의 사회적 기능 약화는 보수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달을 통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여전히 종교의 기능을 부인하지는 않고 권장하기도 한다. 풍요는 신의 축복이기도 하다. 진보의 입장에서는 종교가 시민의 민주 의식에 방해를 준다고 여길 수도 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극단적으로 종교를 공동체의 위협 요소로 보았다.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여성 인권에 방해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기후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차라리 종교가 발달했던 시기에 인간 문명의 급속한 발전을 억눌렀다는 점 때문에 반드시 나쁘게만 보지 않을 수 있다. 또 신의 유산을 망치는 행위로 환경 파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신이 부활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이러한 삼각뿔에는 ‘무신론, 유신론(유일신론), 범신론, 이신론’으로 찍든, ‘하루속히 통일, 점진적 통일, 통일 회의론, 범아시아 공동체 통합론’으로 하든 다양하게 찍어볼 수 있다. 다만 단순히 삼각형의 한 꼭짓점은 단순히 다른 점들의 중간점이 아니라 서로를 입체적으로 상호 견제하는 도약하는 지점이라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또 그것이 반드시 정반합의 관계로 더 나은 지점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다른 지점을 새롭게 보게 한다는 점에서 명제의 분류표에서 볼 때 배제자의 시선일 때도 많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서로 관계된 점들의 원래 의미와 위상을 역전하는 발상으로 가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과 기후 운동 사례도 그랬지만 통일의 시기로 선을 그어서 하루속히 하느냐 점진적으로 하느냐 하는 담론을 뚫고는 아예 통일을 왜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갑자기 차원 도약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시 통일을 왜 민족끼리 해야 하느냐면서 통일 회의론과 통일 시기론을 모두 견제하면서 범아시아적인 경제공동체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 탈민족 정치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한다면, 민족의 범주를 벗어남으로써 논의의 차원이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