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 고흐
"고마워, 오빠."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원룸으로 들어섰다. 자동센서가 켜졌지만, 여자는 빨간 구두를 벗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원룸의 침대로 누워버렸다. 침대 바깥으로 빨간 구두가 보였다. 남자는 한숨을 지으며 "구두는 벗어야지"라면서 자신의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그냥 잘 들어가는지만 보고 갈 생각이었지만 결국 끈을 풀고 원룸에 들어서야 했다.
여자의 버릇 때문이다. 술만 마시면 오랫동안 생활하던 외국 버릇이 나오는 것이다. 신발을 신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 침대에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것. 술이 깨고 나면 할 일이 많아지는 버릇. 여자는 국내에 들어와서는 외국계 회사를 다녔다. 그곳에서는 연중에 외국처럼 파티를 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호텔로 가기 위해 빨간 원피스를 입고, 사내의 동료들과 함께 재즈 공연을 했다. 자신은 가수였다. 그러니 무대 의상을 입고는 화려한 밤을 보낸 셈인데, 그런 날인만큼 독주가 과했던 모양이다. 결국 바래다 달라면서 남자친구를 부른 것이고, 가끔 있는 일이었다. 남자친구는 자려다가 차를 몰고 여자를 픽업해서는 그녀의 원룸에 데려다 주었다. 지방에 본집이 있어 출퇴근을 위한 원룸은 각종 짐들이 풀리지 않아 항상 부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벌써 서울에서 직장을 다닌 지 1년이 가까워졌는데, 짐은 필요할 때 천천히 하나씩 풀렸다. 어떤 짐들은 과연 풀리기나 할까 싶었다.
"나중에 영원히 안 풀릴 것 같은 짐이라는 사실이 판명나면, 그 짐은 본집으로 보내려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신발을 신고 침대로 들어가는 버릇에는 합리적인 이유를 대지 못했지만.
"글쎄, 인간에겐 비합리적인 무의식이 있고, 우리는 늘 술에 취하면 무의식적 요소에 지배당하지. 십수 년을 외국에서 지내면서 생긴 버릇인데, 술만 마시면 그러네. 그 습관 탓에 나도 내가 미웠어."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문화는 한국식이 괜찮은 것 같다면서. 말이라도 못하면 그런가 싶었는데, 참, 말을 잘했다.
남자는 원룸으로 들어가 여자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발에서 구두를 벗겨냈다. 그것을 들고 자신의 신발이 놓인 바로 옆 자리에 구두를 놓으려는데 여자가 잠꼬대처럼 말했다.
"오늘도 사랑해. 내일 봐, 자기야."
자동센서가 다시 켜지고 남자의 신발을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