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불과 와주

산문 (2012년)

by 희원이

와플은 입에 달다. 그러나 와불은 입에 잘 달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나는 오래 전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본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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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불(卧佛)은 “누워있는 불상”을 뜻한다. 신도들(클라이언트)이 기도를 하는데 부처님(상담자)은 누워있단다. 가장 편한 자세로 신도들의 예배를 받는 것이겠다. 현대에도 이런 상담자는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영업하다가는 얼마 못 가 상담소 폐쇄해야 한다. 부처님이니까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부당하게 대우받는다. 만날 공중에 뜨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으신다. 그러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다 상담해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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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은 참 못 됐다. 설교 하시면서 예수님 그 위에 대롱대롱 매달아두신다. 방치한다. 얼마나 아프실까? 참된 목자라면 그분 땅에 내려놓아 편한 자세로 상담할 수 있도록 손을 써야 한다. 목사님들 하나도 그런 분 없다. 심지어 몇몇 분들은 상담비까지 가로챘다고 뉴스에 나온다. 정말 나쁘다. 그 돈 몇 푼 된다고 목숨까지 걸고 고통의 길 걸으신 예수님의 용돈을 빼앗으신다. 그러면 벌 받는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 부처님만 봐도 그렇다. 그분은 신도들 예배볼 때 높은 곳에 편하게 가부좌 틀고 앉아계신다. 고대에는 보리수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 쐬시면서 묵상하셨다. 심지어 누워서 상담하시기까지 하니 예수님이 보면 억울할 만도 하다.

신도들이 내는 용돈을 다루는 것만 봐도 그렇다. 부처님께서는 시주도 받았다. 걸식 공양하여 신도들이 만들어준 밥을 드셨다. 부처님 앞에 놓인 시주함에는 돈이 가득 쌓인다. 반면 예수님 돈통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며 돈 걷고는 십자가에 걸어두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져간다. 그것 어떻게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은 억울할 것이다. 노동은 혼자 다하고 돈은 교회가 챙긴다. 몇몇 목사님이 그렇다는 뜻이다.

더구나 생전에 육신을 입은 예수님께서는 포도주와 음식까지 만들어 일일이 신도들 대접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부처님은 고기도 얻어 드셨는데, 예수님은 그것도 제대로 못 얻어 드시고, 하루 종일 서서 설교하다가 공중을 들려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불공평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인류애를 짊어진 두 분인데 처우가 다른 것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와주’를 만들어야 한다. 주님도 가끔씩 ‘누워서’ 설교도 하고 그래야 한다. 돈통도 앞에 놓아드리고 못도 좀 빼드려야 한다. 겸허히 그의 뜻을 기려야 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하나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 속에 살아계신 여호와의 아드님이지 않은가. 인권을 말하려면 그의 과중한 노동 여건과 불합리한 분배 문제부터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그것 개선해야 비로소 부처님과 함께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로서 예수님이 재탄생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예수님께서 오만해지실 리 없다. 그분은 원래 완벽한 분이시다. 간혹 인간의 눈에는 그 분이 거만해보일 수도 있다. 예컨대 과거 삼류 설교자로 취급받으며 핍박받다가 돈통 앞에 놓고 ‘누워서’ 설교하는 일류 설교자가 되면, 이렇게 말하실 수는 있다.

“너희가 와주어야 한다. 천국으로 오라. 버스 번호 잘 보고 타라. 지옥행 타면 안 된다. 천국행인지 기사에게 물어보고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영생을 보장하리라.”

이러실 수는 있다. 오래 전 스스로 육신까지 입으시고 우리에게 와서 온갖 무시를 당한 것과는 천양지차다.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분들은 대놓고 안티로 돌변할 수도 있다.

“언제 자기가 누워서 설교했다고, 감히 우리에게 오라가라야?”

격분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 아는가? 그분이 마음속으로 눈물 흘리며 우리를 애타게 낙원으로 부르는 것을. 잘 들어보라.



그는 우리를 위해 울고 있었다.

더구나 세상 모든 사람에겐 부처님도 예수님도 깃들어 있으니 와불도 와주도 이미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 우리가 그분들의 말씀을 따르는 순간, 우리도 부처님이요 예수님의 제자다. 곧 그분들의 자녀가 되고, 기어이 부처와 예수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 곳 정처 없이 떠돌지 않아도 된다. 그저 마음속으로 한 발자국씩 내디디면 된다. 돈 드는 일 아니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된다. ‘와주’는 편안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신다. 우리의 ‘와주’는 삶의 안식처가 된다. 그러니 삶과 사랑을 깊이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와주어야 한다. 어여 와주어야 한다.





※ 김성규, <K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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