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영원히 사는 새
1부. 안녕 (2003년 8월)
2부. 에반게리온의 죽음 (2003년 8월 이후 어느 날)
3부. 어느 이상한 아이에 관한 동화 (2003년 8월 이후 어느 날)
어쩌다가 이곳에 살게 되었냐고요? 그런 질문 자주 받지 않았냐고요? 그랬죠. 하기야 저도 그렇게 궁금해하는 걸 이해합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무인도와 다를 바 없는 이곳에서 풀뿌리나 가꾸며 그래도 제법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기 위해 길도 닦고, 울타리도 치고 오두막을 튼실하게 수리하면서 살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의 왕래가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인근 마을과도 외따로 떨어져 있지만, 근처의 경치가 좋아서인지 뭍사람들이 섬에 오면 들르곤 하는 곳이었죠. 제가 닦아놓은 길 덕분에 사람들은 다른 곳보다는 비교적 편안하게 이곳을 찾곤 했지요. 그들은 오두막 근처를 지나다가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라는 반응을 보이며, 울타리 앞에서 기웃거립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오두막 문을 열고 나가서 그들에게 “이곳에도 사람이 산답니다.”라고 대꾸하듯 가볍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곤 하지요.
“요새 바깥세상은 어떻습니까. 살만한가요?”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정말 사람이 사네.’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신기한 사실을 알았다는 만족스럽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냥 살던 대로 늘 그렇게 사는 거죠.”라는 비교적 예상하기 쉬운 답을 하곤 하죠.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죠. 신기할 테니까요. 어떻게 이런 외진 곳에서 혼자서 이만큼이나 일구고 살았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말이죠. 저를 쳐다볼 겁니다. “정말 이 많은 걸 혼자서 해냈습니까?”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안에 들어가 봐도 되겠느냐며 여전히 확인하고 싶어 할 겁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어차피 그들은 그렇게 신기하게 쳐다보고는 사진을 몇 장 찍고 갈 테니까요. 행여 호기심이 발동한 사람들이 차를 청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혼자 살게 된 이유를 듣고 싶어서일 겁니다. 그러면 저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혼자서 사는 게 체질인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휴식처럼 찾아온 사람들의 선의에 찬 모습을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 일상에 치여 지쳐버리는 부작용을 낳지는 않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저는 가끔, 아니 아주 자주 사람이 그립고, 그들과 치여 살기를 원했던 사람인지라, 이들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이겠죠. 차를 준비할 겁니다. 그리고 물이 끓는 동안 사람들을 오두막 앞마당에 마련된 식탁으로 안내할 겁니다. 그 자리에는 무료할 때 틈틈이 읽던 책이 놓여 있을 거고, 사람들은 자리에 앉기 전에 책의 표지를 살피며 잠시 책에 관해 이야기할 겁니다.
“감동적이었어요. 이 책 스무 번은 읽었을 겁니다.”라고 시작된 말은 언제 어디서 그토록 감동을 받아서 울고 웃었는지, 첫사랑에 대한 감흥을 채 떨어내지 못한 소년 소녀의 모습으로, 경이롭게 얘기하겠죠.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제가 차를 내오는 동안 정말 이곳에 오길 잘했다며 호들갑을 떠는 중년부인이 있을 수도 있겠고, 이곳에서 살자고 졸라대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악의를 띠지 않은 사람들과 둘러앉은 저는 무척 행복할 겁니다. 두런두런 말을 이어가겠죠. 그러다 보면 분명 한번은 거치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두막은 언제 지었나요? 혼자 지었어요? 왜 혼자 이곳에?”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선량한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저의 이야기를 기다릴 겁니다. 뭔가 사연이 있으리라는, 그리고 그것은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낭만적인 이야기일 것이라는 기대를 잔뜩 지닌 채 말이죠. 그러면 저는 일단 웃을 겁니다.
“글쎄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요?”
뜸을 들일 겁니다. 사실 항상 이야기를 시작할 때 난감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시작해야 할 지점을 잘 모르니까요. 그들의 호기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한 아이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쉬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저를 쳐다보는 또렷한 눈망울들을 배신할 수가 없어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겠죠. 그래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사실 여러분이 있는 이곳은 섬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종종 관광객이 오기도 하지만 섬이 되었던 초기에는 정말 사람이 드문 곳이었죠. 그리고 그보다 전에, 그러니까 이 부근이 육지였을 때 한 아이가 오두막에 살고 있었죠. 혼자서 말이죠. 못 믿으시는 표정이네요? 저도 이해합니다.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죠. 아이가 혼자 살았다거나, 원래 육지였는데, 섬이 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허황된 거짓말처럼 들리기도 하겠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사실인 것을.
맞아요. 그러니까 제가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아이가 살고 있었죠. 예, 정말 혼자였습니다. 그전에야 어떻게 혼자서 살게 되었는지 저도 알 수 없죠. 아이랑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저는 정말이지 아이에 관해 아는 것이 없더라고요.
하기야 아이와의 첫 만남부터 정확히 기억할 수 없죠.
저도 처음에는 머리를 식힐 겸 무작정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직장상사는 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었고, 승진 시험까지 떨어지고 나니 암담했습니다.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드라이브를 하게 된 거죠.
분명히 속력을 150km까지 올려 달렸는데, 갑자기 불빛이 번쩍하더니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팠습니다. 아니, 아프다기보다는 차라리 아프길 바랐습니다. 뭔가가 나를 잡아끄는 듯했는데, 그건 마치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힘 같았어요. 그런 힘에 이끌려 내 몸이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죠. 두렵다기보다는 평온했습니다. 그래요, 이 정도의 표현이 정확할 듯싶군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는 아이가 사는 오두막이었습니다. 아이의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안은 온통, 아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의 향으로 가득했습니다. 맞아요. 지금 차에서 나는 향 말이에요. 재스민 종류의 식물에서 채취한 향이었죠.
어쨌든 침대에서 일어나려 할 때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로 온몸이 쑤시고 저렸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처음으로 대면했고, 그때부터 이 오두막에서 살았습니다. 아이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아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있어서 이해할 수 있거든요. 쌀 도둑이 들어와서 쌀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데 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쌀독이 있는 곳을 가리켰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입니다. 집에 쌀이 많으니 더 퍼가라고 거들기까지 했으니.
아이도 그때 저를 보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물끄러미, 정말이지 이 단어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표현을 찾기란 어려울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는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별다른 반응은 없었습니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평범한 아이답지 않았죠.
그때의 감정을 곰곰이 들춰보건대, 그냥, ‘이상한 아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아이는 오두막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무슨 일인지 모를, 아, 이렇게 말하는 건 숨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죠. 그뿐입니다.
아이는 하던 일을 계속 하려는 듯이 보였습니다. 저도 아이의 반응에 조금은 어이가 없기도 했고, 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잠시 서서 지켜보았죠. 생각에 집중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특별하게 움직이지 않고 한참 동안 아이의 앞에 놓인 캔버스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아, 맞아요. 그러니까 제가 오기 전부터 아이가 살고 있었죠.
어쨌든 아까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오두막 안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3명 정도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공간을 향유할 수 있을 정도의 거실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거실이 아니라, 그냥 방이죠. 따로 방이라는 공간이 없으니, 말하자면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거실이자 방이 되겠군요. 아이가 주로 앉아 있는 곳은 방의 중간이었는데, 아이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침대가 창가에 바짝 붙어있었습니다. 침대 옆에는 캔버스들이 쌓여 있었죠. 그곳으로부터 대각선 반대쪽에 식탁이 놓여 있었죠. 식탁 근처엔 주방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방 기기와 침대 창가에 놓인 화병에서는 상쾌한 향이 났고, 향기는 오두막을 감쌌습니다. 아이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아본 적이 없는 듯 오로지 캔버스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이야, 혼자 사니?"
아마도 제가 아이에게 던진 첫 대사가 이게 아니었나 싶군요. 이상하게도 제가 왜 거기에 있는지, 아이가 어떻게 저를 발견했는지 궁금하기보다는, 아이가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궁금했었죠.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시선은 캔버스에서 떼지 않았고요.
무얼 그리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캔버스에 몰입했습니다. 어떻게 혼자 살게 되었냐는 둥 쉬어가도 되겠냐는 둥 여러 말을 던졌지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가벼운 반응을 보일 뿐이었죠. 결국 저는 아이가 캔버스에서 눈을 뗄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식탁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아이를 주시했습니다. 아무런 표정을 지니지 않고, 오로지 캔버스만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조금 과장하자면 ‘무아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요? 아이는 갑자기 미소를 짓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캔버스를 들고 침대 옆에 쌓인 캔버스 옆에 그것을 놓더니 잠시 다른 캔버스를 뒤졌습니다. 그러고는 빈 캔버스를 하나 잡고는 그것을 들고 와 캔버스 받침대에 놓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자세로 무엇을 그렸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빈 캔버스를 캔버스 받침대에 놓고 있을 때 침대 옆으로 가서 조금 전에 숨긴 캔버스를 살짝 들추어보았습니다.
백지였습니다.
그토록 집중한 작품이 그저 백지였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아 흰 캔버스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이에게 말을 걸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만 제풀에 지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식탁에 눌러앉았습니다. 피곤했습니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바깥에 보이는 정경들은 저에게는 너무 낯설었습니다. 숲이 우거지고 산새가 울고 다람쥐가 보이는 풍경이란 책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뭐, 실제 도시생활에서는 그림의 떡 같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복잡할 때 이런 생활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다시 돌아갈지도 몰랐지만 잠깐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습니다. 직장에선 어차피 나올 거라고 다짐한 터라 굳이 연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죠. 오히려 문제는 아이였는데, 만일 그가 허락한다면 며칠만 오두막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물론 아이는 허락도, 그렇다고 딱히 거절의 의사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캔버스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이가 캔버스를 바라보지 않는 시간은 식사를 하는 경우나 잠을 자거나, 산책하는 경우였습니다. 식사라고 해봐야 어른의 반의반에도 못 미치는 양이었고, 잠도 거의 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어디론가 산책하러 가곤 했으니까요. 산책하는 시간은 조금 길었습니다. 제가 잠에 곯아떨어져 식탁에서 얼굴을 비비고 있으면 아이는 상기된 표정으로 오두막에 들어섰습니다. 이미 밖은 환하고 상쾌한 기운이 문으로 밀려 들어올 때였죠. 새가 지저귀고, 풀들이 바스락거렸습니다.
아이는 실내에 들어서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저를 보고도 인사를 건네지 않는 아이. 타인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 듯한 표정. 아직 그 아이는 전혀 때 묻지 않은, 아니, 때 묻을 기회조차 가져본 적이 없어 보였습니다.
울창한 숲에서 누가 지었는지 모를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온 아이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할 줄 아는 듯했습니다. 이를테면 먹기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자기 위해 침대를 푹신하게 만들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와 그림 도구들을 준비하는 따위 말입니다. 아참, 아이가 이런 것을 하기 위해 분명 사람을 만나기는 했겠죠. 아이는 아마도 그 길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필요한 물품을 사왔었겠죠. 그런데 어떻게?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일이에요.
아이와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 그건 말이죠. 여기 살아보면 압니다. 시간이라는 게 도시에서는 속박의 도구로 다가와 보이지 않게 우리를 채근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마련이죠. 긴장을 늦추고 물 흘러가듯 흐르는 시간은 더 이상 속박이 아니잖아요. 자연히 느끼기가 어려워지죠. 굳이 따지자면 두 달 정도 이곳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로 느껴지는군요. 왜 집에 가지 않았냐고요? 찾는 사람도 없어요. 가족도 없고, 직장은 어차피 그만둘 것이니 딱히 갈 곳도 없었고요. 더군다나 이곳의 맑은 공기와 사람의 때가 타지 않은 풍경이 저를 매료시켰죠. 아이와도 친해지는 데는 오래 걸렸습니다.
도무지 사람과 가까워지는 법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친해지려고 무던히 노력해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지내던 차에, 하루는 비가 억수로 퍼붓더군요. 그런데 아이는 여전히 밖으로 나가려 하더군요. 말렸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만 남기고 나가버리더군요. 이상한 아이지만 일단 한다면 하는 녀석이었기에 어떻게 막아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비가 오니 곧 상황을 알고 돌아오겠지”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서 숲 속의 나무들을 뒤흔들고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사방에 울려대는데도 아이는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걱정하기 시작했죠. 한참 지나고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저는 결국 아이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의 지리는 아이가 어련히 잘 알지 않겠냐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죠.
그렇다고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지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어디를 갔는지도 몰랐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어두워진 주변을 느끼며 잠이 들었습니다.
인기척이 들려 눈을 떴을 때 주변은 다시 밝아져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아이는 비에 흠뻑 젖은 옷에 짓눌린 듯 피곤해 보였습니다. 창백해진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죠.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고요. 저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스프링 튀어 오르듯 식탁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아이는 눈빛에 초점을 잃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제가 다가가 이마를 짚었을 때 뜨겁게 달궈진 용광로에 손을 대는 듯했는데, 아이가 밤새 비를 맞으며 헤맸다는 생각을 하니 진작 말리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아이가 오두막으로 돌아왔으니 제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었죠. 우선 옷을 벗기고 물기를 수건으로 닦았습니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입힌 후 아이가 저를 위해 내어주었던 침대에 아이를 눕혔습니다. 열이 빠져나가도록 이불을 걷고, 잠옷의 단추를 세 개쯤 풀어 가슴의 열이 내리도록 했습니다. 아이는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을 감은 채 눈물이 뺨과 관자놀이를 타고 떨어졌죠. ‘새, 새’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죠. 처음으로 아이에게서 사람의 이름을 들은 거죠. 무의식중에 애타게 찾던 이름이 공기를 타고 오두막 전체로 퍼졌죠.
새, 새…….
저도 모르게 아이를 따라 그 단어를 되뇌었죠.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병치레를 오래 하던 아이가 마침내 거의 완쾌되어 예전처럼 산책을 해도 될 정도가 되었죠.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저와 짧게나마 대화를 하게 되었죠. 아마도 병간호 덕분이었습니다.
아이의 첫마디는 ‘고마워요’였습니다. 아이는 사심 없어 보이는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저에게 고맙다고 한 거죠. 뭐, 대단한 일이랄 것은 없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말하지 못하는 줄 알았던 아이가 말을 하다니, 그 자체로 진일보했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리고 몇 마디를 더했는데 마지막 말, “그림을 그려야 해요”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죠. 왜 그랬냐고요?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마치 자신의 모든 열망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그러니까 간절한 느낌을 지닌, 단 한마디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림을 그려야 해요…….”
그랬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말처럼 정말로 회복되자마자 캔버스 앞에 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전처럼 뚫어지게 캔버스를 쳐다보았죠. 그날은 정말이지, 오로지 캔버스만을 쳐다보더군요. 식사를 하자고 불러도 대꾸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정말이지 오로지, 캔버스만을 바라보았어요. 하나에만 집중하는 아이는 주변의 모든 걸 압도하는 듯했어요. 어떻게 그런 기운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숨이 막히더군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두워지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제가 자자고 권했죠. 하지만 예상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더군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이의 침대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죠. 얼마나 지났을까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아이가 옆에서 자고 있더군요. 저는 하품을 크게 하면서 일어났는데, 처음으로 눈에 들어찬 것은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궁금하시면 차 다 드신 후에 오두막에 들어와서 보세요.
예, 그림이었어요. 제가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아이의 그림을 보게 된 거죠. 어떤 그림이냐고요? 그건 말이죠. 새였어요. 빛나는 진홍과 금빛 깃털을 지니고 천상의 소리를 낸다는 새였어요. 그때 “새에요. 새.”라는 소리가 들렸어요.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자 어느새 일어난 아이가 제 뒤에서 말마디를 내뱉었죠. 아이는 캔버스로 다가가 물감이 말랐는지 유심히 살피더군요.
불사조라고 말해줬어요. 하지만 아이는 불사조라는 단어를 모르듯 했습니다. 저를 멀뚱멀뚱 보더군요. 그래서 다시 말했죠.
“이 새가 네가 말하는 그 새니? 이건 영원히 산다는 전설 속의 불사조야.”
정말이지 아름다운 모습의 새였습니다. 우아한 깃털이 달린 날개를 힘차게 펼치고 하늘을 날고 있는 새를 묘사한 선의 터치는 박력 있고, 생동감이 있었어요. 마치 진짜로 천상의 소리가 공간에 들어차 있는 듯이 느껴졌죠. 새의 시선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는데, 맑고 큰 눈망울은 아이의 눈을 닮았고요.
아이는 “이건 내 친구 새예요, 새.”라고 자꾸 강조했어요.
저는 아이의 상상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직접 보지 않고선 그러한 세밀한 표현은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새는 아라비아에 살며 500년마다 그것의 존재를 믿는 이집트인들에게 나타난다는 전설 속의 새인데, 여기까지 날아왔나 보구나.”
웃으면서 아이의 말을 받아쳤죠. 아이의 놀라운 재능에 속으로 감탄하며 잠시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죠. ‘죽음이 가까워지면 향기 나는 나뭇가지로 둥우리를 틀고 스스로 불을 지르고 몸을 태워 다시 태어난다’는 불사조가 오두막 주위에 살 거라는 엉뚱한 상상까지 들더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그러니까 아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를 그리기는 불가능했을 거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 만큼 아이의 그림은 정말 감동적이었죠.
“이건 새예요. 새.”
아이가 말하더군요. 그래서 물었죠.
“언제 보았니? 불사조를, 아니 새를.”
오래전부터 산속에 산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며칠 전, 그러니까 아이가 빗속을 헤맨 후 몸살이 났을 때 이곳을 떠났다고 하더라고요. 헤어지기 위해 새를 만나러갔던 거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눈에는 물방울이 맺혀있었어요. 아이는 그림이 마른 상태를 확인하고 그림을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죠.
동화 속에 살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아이가 어떻게 오두막에서 혼자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이를 제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죠. 혼자서 이런 식으로 현실감각을 잃고 살다가는 영원히 환상 속에 갇혀 불행해질 거라고 단정했었답니다. 결과적으로 그게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말이죠. …….
아,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담배를 태워본 지 정말 오래되었네요. 언제 피웠는지 기억도 나질 않으니까요. 아, 정말 좋군요. 살짝 어지럽군요. 하하, 오랜만에 피니 어쩔 수 없네요. 어디까지 했었죠? 맞다.
그러니까 그런 결심을 한 이후부터 저는 아이를 따라 산책하면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답니다. 생활을 변화시키기에 앞서 먼저 오두막 주변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파악해야 했으니까요. 형아, 형아, 하면서 신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 처음으로 사람과 산책을 하는 듯했죠. 지나가면서 잡초나 나무, 돌을 가리키며 자신의 친구라며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정말이지, 주변은 온통 풀과 나무와 돌뿐이었죠. 저는 사람이 사는 곳이 어딘지 궁금했습니다. 아이가 먹을거리나 그림 도구들을 구하려면 분명 근처에 마을이 있어야 하니까요. 아이는 마을이 어디에 있냐는 제 질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저를 끌고 다니며 자신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해주려고 안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먹고 살려면 우선 마을을 알아야 하는데, 아이는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다른 것에만 열중하였죠. 결국 저는 지쳐버리고 혼자서 찾아보기로 작정했어요.
저는 그 다음날부터 아이의 산책과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숲을 헤매 다녔습니다. 그러길 며칠째 하다 보니 드디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길을 발견했죠. 길이라고 해봐야 제가 지금 만들어놓은 길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어쨌든 분명 흙을 반듯하게 다져놓은 길이었습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조그만 마을이 나오더군요. 사람들이 분명 살았습니다. 너무 기뻤죠.
사람들은 하나같이 구릿빛의 살색을 지닌 건강한 사람들이었죠. 논에서 일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에는 걱정이 없어 보였습니다. 지나가던 아낙네에게 물었죠. 마을에 대해서, 아이에 대해서 말이죠. 마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아이도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가끔 나타나 집집마다 들르며 그림을 그려주곤 먹을 것이나 그림 도구들을 얻어간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마을 사람 모두 아이가 어디에 사는지는 잘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노인도, 아저씨도, 시냇가에서 놀던 아이들도 아이의 집을 모른다고만 하더라고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근처에서 오랫동안 살았는데도 이토록 모를 수 있다니 말이죠.
어쨌든 저는 그들에게 일손을 빌려주는 대가로 오두막에서 키울 작물과 울타리를 치고 오두막을 꾸밀만한 물건들을 얻기로 했어요. 일단 기본적인 건 갖출 발판을 마련한 거죠. 다음날부터 마을에서 일을 돕기로 하고 기쁜 마음에 한걸음에 내달았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이라 쉬울 줄 알았는데, 길을 찾는 데 한참 헤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오두막을 모르는 이유를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밤이 되어서야 오두막에 도착했는데, 아이는 여전히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죠.
예전처럼 그림은 그리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번 가볍게 미소 짓는 행동 말이에요. 저는 기쁜 마음에 그런 행동도 개의치 않았고, 아이에게 마을 사람들에 대한 첫인상을 말해주었죠. 선량해 보인다, 건강하고 긍정적인 사람들이다, 라고요. 저를 보고 아이는 “형아, 형아”라고 반복하며 웃었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날부터 저는 마을로 찾아가 일을 하고 삯으로 얻은 작물과 생활용품을 받아들곤 오두막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산책을 하고 작물을 일구기 위해 오두막 마당 한구석에 밭을 만들기 시작했죠. 울타리도 틈틈이 만들어갔습니다. 아이에게 ‘자신이 있어야 할 곳’과 ‘재산’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에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혼자서 살아야 할 텐데 언제나처럼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요. 아이는 제 말을 그럭저럭 잘 따라 주었죠. 아마도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나 봅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그날까지는……. 그래요, 아이가 사라진 날이죠.
사실 언뜻 보기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 사건이었죠. 하지만 그것이 한 아이에게는 엄청난 상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걸 아이가 사라진 후에야 깨닫게 되었어요. 어찌 보면 인간은 그리 똑똑한 동물은 아닌듯해요.
아니, 제 잘못을 비겁하게 전체에게 떠넘기려고 하는군요. 다시 말하겠습니다. 단지 저의 어리석은 행동 탓에 한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아이를 그의 세계에서 쫓아버렸어요. …….
그날도 평소처럼 마을에서 일을 마치고, 고기를 얻어서 돌아왔었죠. 당시엔 걱정이라고 해봤자 저녁 반찬을 뭐로 할까, 비가 언제까지 올까 하는 정도의 사소한 것이었죠. 그만큼 안정되고 평온한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는 가끔 캔버스 앞에 앉아 있곤 했지만 예전보다는 활달하고 밖에 있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제가 일을 하는 동안 어떤 일이 있는지 몰랐지만 그래 봤자 캔버스에 앉아 있는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오두막에 들어섰을 때 아이는 없었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있었는데, 근처 어디에도 아이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저녁으로 먹으려 했던 고기를 식탁에 놓고 침대에 앉아 밤이 깊어질 때까지 아이를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돌아온 시각은 동이 틀 무렵의 새벽이었죠. 역시 전처럼 상기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또, 그랬습니다. 아이는 열이 한껏 올라 있었는데, 눈이 풀렸고 쉰 소리를 작게 냈습니다. “또 새를 보고 왔니? 떠났다며?”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침대에 누울 생각도 하지 앉았습니다. 그냥 캔버스로 곧장 가더니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스케치하기 시작하더군요. 스케치하는 속도가, 뭐라고 해야 하죠, 음, 맞아요! 전광석화. 정말 빨랐습니다.
역시 불사조였죠. 이번에 캔버스에 들어찬 그것은 둥우리를 틀고 앉아있는 모습이었는데 둥우리는 불길로 가득했습니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이 역력했죠. 그런 표정으로 울었다면, 무척 비극적이어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비명이 주변을 가득 메울 것이 분명했어요. 비명이라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말이죠. 어쩐지 그 고통이 저의 온몸으로 전이되는 느낌이었죠. 벌레가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전율이 파먹을 듯한 기세로 온몸에 퍼졌습니다. 아이의 감정이 오두막을 엄습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았어요. 정말이지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그만, 아이의 손에서 연필을 잡아채서 분질러버렸죠.
“너, 정말 이래선 안 돼!”
애타게 소리치긴 했었는데, 어쩌면 제가 정말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을 수도 있죠. 아이는 상기된 표정으로 눈물을 눈 속에 담은 채 저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려야 해요! 그려야 해요!”
아이는 그려야 한다며 울먹였습니다. 새새를 그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울먹였죠.
“이건 불사조야, 전설 속의 새고. 실제로는 없는 거잖니?”
안타깝게 소리쳤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 때 새새를 그려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저는 캔버스를 들고 부숴버리려는 시늉을 했죠. 그러자 아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두 발자국쯤 물러서더군요. 심장을 떨어뜨렸습니다. 오두막 안에 아이의 심장이 굴러다녔습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말이죠. 저는 아연했어요.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죠.
“형아는 나빠요! 형아는 나빠요!”
아이가 곧장 오두막 밖으로 튀어 나갔습니다. 저도 급하게 캔버스를 내려놓고 녀석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어찌나 빨리 뛰어가던지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사방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이가 사라진 방향에서 홍수처럼 급물살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짭짜름한 물은 아이의 눈물 같았죠. 물살은 작물을 망치고 울타리를 무너뜨렸습니다. 오두막 앞까지 밀려 들어오며 제 발목까지 기어 올라와 찰랑거렸죠.
이때 동이 터오는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밝은 빛이 숲 속에서 떠올랐죠.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소리만 아니었어도 영락없이 해가 떠오른다고 착각했을 겁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아이의 그림 속에 등장하던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죠. 온몸을 감싼 찬란한 깃털이 구석구석 타들어 가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였죠. 다시 살기 위해 노쇠한 몸을 버리는 의식으로 느껴졌죠. 온 하늘을 덮은 새의 불빛은 아주 잠시 사방을 밝게 하더니 아름다운 소리와 함께 아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졌죠. 발목에서 간질이는 물만이 아이가 지나간 흔적을 말해줄 뿐이었습니다. 아찔했죠. 어쩌면 불사조가, 아니, 새새가 떠올랐을 때 많은 이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의 아이를 찾거나, 혹자는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고 목 놓아 울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이는 무심히 같이 살던 아이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순간 아이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아이를 잃었습니다. 아이는 저로부터 떠나버린 거죠. 숲 속을 헤매며 아이를 찾아봤지만 이미 늦었죠.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해가 떠오르고 아침의 기운은 상쾌했지만 짠 냄새가 코를 아프게 자극했어요. 갑작스러운 재난에 마을사람들은 당황해서 허둥지둥했죠. 큰 피해를 입은 가구도 있고, 다행히 심각한 피해를 모면한 가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마을의 반을 삼켜버린 물은 여전히 빠지지 않고 지금 이곳을 섬으로 만들어버렸죠. 사람들은 업종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짠물에 배어버린 농토에선 작물이 잘 자라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어업을 위해 마을 근처에 나루터를 만들고 육지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젊은 장정들이 모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 가운데 있었죠. 행여 육지 어딘가에서 아이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이가 특별하게 눈에 뜨일 리 없었죠. 뭍과 섬을 오가며 수소문을 해도 허사였죠. 혹시나 오두막에 돌아왔나 해서 들러보았지만 역시 없었습니다. 아예 뭍에서 전전하기도 했지만 허사였죠. 그리고 결국에는 이렇게 오두막으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그때를 준비하기로 한 거죠. 혹시나 오는 길을 잊었을까 해서 반듯하게 길을 냈습니다. 편평한 돌을 땅바닥에 박아서 비가 오더라도 흙탕물 걱정할 필요 없는 길을 닦았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얻은 물품으로 울타리도 다시 만들고 작물도 기르기 시작했죠.
오두막도 수선했어요. 아이가 왔을 때 아늑한 느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녀석이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그림을 꺼내어 먼지를 닦아내고 빛의 방향을 고려하여 잘 조일 수 있는 곳에 걸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새새가 스케치 된 그림을 받침대에 올려두었습니다. 보관해 두던 흠집 난 심장도 잘 닦아서 아이가 앉던 의자에 놓아두었죠.
그리고 상상했어요. 지친 표정으로 들어오는 아이가 몸을 떨면서 울다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을요. 그러면 저는 조용히 다가가 아이를 감싸줄 겁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잘 왔다고 중얼거릴 수도 있겠죠.
모르겠습니다. 단지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경우에 논리적일 수 있나요? 별로 없질 않나요? 제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주세요. 왠지 모르게 그 아이는 제가 지켜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아이가 오면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겠죠. 아니, 대부분의 경우 백지를 보며 씩, 웃어버리고 말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미 뭍에서 경험한 많은 것들이 아이를 새로운 상상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아이가 그의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고 보거든요.
물론 가끔은 뭍에서 얽혔던 사람들이 근처를 배회하며 아이의 행방을 물을 수도 있겠죠. 그들은 어떤 사연으로 인해 아이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들일 거고요. 그들이 기웃거리면 저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누구를 찾는지 묻겠죠. 그들은 아이의 인상착의를 말하며 아이를 본 적이 있냐고 물을 거고, 그들의 눈치를 살핀 저는 아이가 지나간 행로를 거짓으로 알려줄 수도 있겠죠. 그들과 차를 마시며 마당에서 가벼운 세상 이야기를 하며 겉으로 꾸민 웃음을 내비치고 나면 그들은 유쾌하게 일어설 겁니다. 아이를 보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며 연락처를 제게 줄 수도 있겠습니다. 그 순간에도 아이는 안전하게 오두막에서 자신의 상상에 몰입할 테고, 저는 제가 아이를 위해 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겁니다.
바로 그거죠. 아이가 온다면 저는 비로소 아이를 위해 할 일이 생기는 거예요. 그 기회가 주어져 저의 잘못을 씻을 수 있길 바라죠.
그리고 아이의 몫이 남는 거죠. 그건 말이죠, 그건, 그 아이가 새새를 그리든 그리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의 캔버스를 치우는 일이에요. 그런 후에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시작은 그때부터니까요.
여러분, 아이가 돌아올까요? 혹 회의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이 있을지라도 적어도 저는 아이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2002~2005년 중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