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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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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Jan 08. 2022

[속초 한달살기] D1. 속초에서 한달을 살기로 했다

속초로 건너오는 첫 날이다. 뭐랄까 기쁘고 슬프고 화가 나는 등의 감정이 최근 들어 많이 옅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는데 환기가 되고 새로운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나 활기있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매번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녔던 터라 국내에서 버스를 타고 여행을 위한 이동을 하는 게 꽤나 오랜만이었다. 주말을 앞두고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터미널 안은 북적북적했다. 양양, 강릉, 대구, 부산 한 곳에서 시작해 전국의 모든 곳으로 버스들이 뻗어나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특정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앞 좌석에 앉은 가족은 앞두고 있는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잔뜩 섞인 톤으로 말을 나눴고 뒷자리에서는 고향으로 가시는 것 같은 할머니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하나의 공간 안에 모두가 다른 표정, 다른 마음을 하고 자신을 멀리 떠나 보내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을 10분 앞둔 11시 50분 나를 속초행 버스가 도착했다. 중후한 외모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계신 기사님이 짐을 실을 수 있게 짐칸 문을 열어주셨고 나는 잽싸게 캐리어를 던져 넣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예약할 수 있는 일반 버스가 없어서 우등으로 예약했는데 자리가 생각보다 넓어서 놀랐다. 비행기나 기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여유가 있어 다리를 쫙 필 수 있을 정도였다. 편안했다.


버스가 출발했다. 언제나 그렇듯 왠지 모를 설렘과 묘한 긴장감이 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과 달리 꽤나 후덥지근한 내부 온도 때문에 입었던 겉옷을 벗어 무릎에 올려놓고 잠에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 깨다 하다가 보니 멀리 왔다는 걸 실감나게 해주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거리들 사이사이로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온 마을을 덮고 있었다. 지난주의 폭설로 교통이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상황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한 데 모여 눈을 치웠는지 길 주변으로 눈이 산처럼 길게 쌓여있었다. 쏟아지는 눈이 누군가에겐 동심의 추억이나 낭만적인 기억이, 반대로 어떤 이에겐 불편하고 축축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내 삶도 그렇지 않을까' 삽시간에 생각에 잠겼고, 버스는 이제 목적지에 다 와갔다.


얼음이 짙게 깔린 바닥 위에 미끄러지지 않게 살포시 발을 내얹었다. 안전한 품을 떠나 모든 새로움에 노출되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기대감. 왠지 모르게 공기마저 상쾌하게 느껴진다.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스텝으로 일할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둘러볼 새도 없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돌아가며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첫만남이라 약간의 어색함을 더해 인사를 건냈다. 사실 왜 속초라는 먼 곳까지 와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말이 길어질 것 같아 간단히 줄였다.


할말이 바닥나 애매한 정적이 흐를쯤에 방에 돌아와 대강 짐을 풀고 앞으로 한달동안 반복할 업무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일이라는 게 그렇게 엄청난 건 아니었다.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 오시는 게스트 분들에게 숙박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는 일이 다였다. 사실 별 건 아니었지만 처음 하는 일이기에 쭈뼛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짧은 수습 시간이 지나고 파티를 하러 갔다. 파티를 하러 갔다기 보다는 파티를 도우러 갔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작은 숫자의 모임이었지만 낯선 곳에 온 여행객들은 다들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사실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는 것의 가장 큰 매력은 새로운 사람과의 조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온 첫날부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그중에는 내가 처음 보는 직업군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드라마 촬영팀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마케터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예술계통의 사람들과 보낸 나로서는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 같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들 대부분이 쉼을 찾고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온 것 같았다.


요즘 더더욱 ‘쉼’이라는 키워드를 많이 접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 사람들이 간절히 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코로나가 터지고 온 세상의 흐름이 뒤바뀐 뒤 그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던 지난날들의 여파가 찾아와 마음과도 거리두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문득 찾아오는 시기라 더욱 그런듯 하다. 시를 써주기 위해 지인들에게 키워드를 부탁할 때도 정말 많이 ‘쉼’이라는 단어를 던져주셨는데 여긴 모든 것들이 휴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에 어느때보다 그 사실을 가깝게 알아차렸다.


나도 쉼을 위해 왔지만 이곳에서는 쉼보다 사람을 만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더 많이 느낄 것 같다는 느낌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만난 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며 한참을 떠들었다. 시끄럽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외딴 곳에 있다는 사실도, 평생 만날 일 없었을 사람들에게 인생을 배우는 것도 모든 것들이 기대가 되는 밤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매일이 즐겁지만은 않겠지만 경험이라는 파도는 언제나 그렇듯 힘껏 솟아오를 테니 꽉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 같다.


잔뜩 취한 상태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숙소에 도착했고 방문을 열자마자 침대 위로 몸을 내던졌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옷은 벗고 잤으면 좋았을 것을. 방은 따뜻했고 마음은 방 안의 온도를 따라 같이 흐느적거렸다. 한달, 한달의 시간 안에 난 이곳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은 접어두는 게 나으려나. 온갖 잡생각들로 가득한 하루는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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