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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Jan 09. 2022

[속초 한달살기] D2. 술은 솔직함을 부른다

꽤나 솔직한 우리 혹은 인간의 모습을 마주한 . 진지한 시작에 비해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니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진 않길.


어제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의 여파가 컸는지 하루 종일 몸이 무거워 지친 기색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얼굴이 불그스레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할 일이 크게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숙박을 하실 고객분들이 들어오시기 전에 방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놓고 식사를 하러 갔다. 좋은 공기를 마시며 한참을 걸어 밥을 먹고 오니 남아있던 술방울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거기에 라떼까지 한잔 마셔주니 그제야 숙취가 완전히 가셨다.


그렇게 전날 가져온 정신적 짐들을 전부 풀어헤쳐놓고는 방에 들어와 잠시 눈을 붙였다. 한 시간 정도 잤으려나, 자고 일어나 다시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로비로 내려갔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손님들이 들어오는 게 아니었기에 한 명의 여행객인 나는 테이블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러 내려온 다짐들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어떤 글이라도 뱉어내고자 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내가 쓰려고 했던 책을 쓰는 것과 동시에 속초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지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적어보는 것도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곧바로 일기 쓰듯 있었던 일들을 차근히 되새기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기억되어야 할 과거들이 너무 많다. 사실 하루가 피어나고 다시 지는 게 이젠 아무렇지 않아 무감각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우린 그런 날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아니기를 바란다.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아도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들 속에 우린 어떤 추억들을 가지고 있을까. 그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텐데 나는 과연 그 기억들을 얼마나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니 내가 지나오는 그리고 앞으로 지나갈 하루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낼 오늘의 시간이 조금은 더 뚜렷하게 남아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술술 글을 써갔다.


속초에서의 첫 번째 글을 마무리지을 즈음에 사람들은 지친 마음을 달래고 온갖 설움을 날리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시린 눈을 비비며 도착한 그들은 반겨주는 따뜻함에 흠뻑 젖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술을 들이부었다. 처음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해 멋쩍은 웃음만 간간이 들려왔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들 정신적인 환각 상태에 빠져 마치 평생을 함께 해 온 친구들처럼 친하게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너나 할 것 없이 잔뜩 상기되어 목소리는 점점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이때가 시작이었을까. 우린 더없이 솔직할 수밖에 없는 시간 속에 발을 들였다. 득인지 실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인간들의 솔직한 모습을 보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아, 나는 오늘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시작은 꽤나 신선했다. 피곤해서 일찍 잠에 들고 싶어 물 한 잔을 따르러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중 이상한 실루엣이 복도 끝에 비쳐 무엇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가보니 한 사람이 이 추운 겨울 얼음장처럼 차가울 바닥에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로 누워있었다. 후에 잠시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방에 들어가려 했는데 문이 잠겨 있어 그 앞에서 그대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아침까지 그렇게 누워만 있었으면 진짜 하늘의 문지방과 술래잡기하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만난 유형은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뭐랄까, 성욕에 모든 정신이 지배당한 사람들. 어딘가에 가고 무엇을 하는지가 오로지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이성이 많지 않았던 날에 온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불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하며 까칠하게 사람들에게 대했다. 마치 자기가 기대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실망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려고 하듯. 함께 즐겁고자 했던 사람들까지 잔뜩 불편하게 만들고 그들은 일찍 자리를 떠났다. 알고 보니 그들은 ‘그들이 기대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가는 거라고 했다. 물론 여행의 목적이야 상이할 수 있지만 불필요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킬만한 생각을 가지고 누군가를 만나고자 한다면 그 시간을 여행이 아닌 다른 곳에 사용하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이 다른 공작을 유혹하기 위해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한껏 치장을 하고 와 으스대는 걸 보니 내 몸이 다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또 다른 유형은 무조건적인 반말형이었다. 분명 술을 마시기 전까지만 해도 말주변이 많이 없어 낯을 가리는 것 같더니 취기가 올라오니 격양된 말투로 모든 이들을 친구로 만들기 시작했다. “야”하고 스스럼없이 반말을 던져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들은 불편해하기도 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듯했다. 당연한 걸까.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건 물론이고 그 말들을 정말 시끄럽게 뱉어냈다. 그것도 친한 친구한테 말하듯. 친화력이 좋은 것과 예의를 차리지 않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아, 물론 안 좋은 유형들만 있는 건 아니다. 무뚝뚝해 보이던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여려지는 걸 보기도 했는데 그 기억도 꽤나 귀중했다. 그 사람은 자리를 옮길 때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신이 취한 것 같다며 연신 착한 말투로 사과를 했다. 물론 자신이 하는 말들을 전혀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그 사람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친근함을 표시했고 그 때문에 다른 이들도 덩달아 기분이 올라 분위기가 좋아졌다. 착해지는 게 주사라니. 원체 사람 자체가 착했기에 가능했을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새벽 1시가 막 지나고 있다)까지도 남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조용하게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노래가 나오니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사람, 지쳐 쓰러질 것처럼 눈을 반쯤 감은 채 꾸벅꾸벅 조는 사람, 자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 등 저마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기분 좋음을 표현했다. 이쯤 되니 술은 도대체 어떤 힘을 가져다주는 건지 궁금해졌다. 우리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게 해 주고 숨김없이 자신이라는 사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내 입장에선 굉장히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앞서 언급한 여러 유형들을 보며 그들에게 술은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술이 우리가 지금껏 감춰왔던 감정들을 외부로 꺼내게 해 준다는 점이다. 힘들었던 것도, 기뻤던 것도. 술을 마셨을 때에 모든 감정들을 스스럼없이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솔직함을 숨기며 살아왔다는 말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죽을 만큼 슬퍼도 묵묵히 괜찮은 척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사무치게 기쁜 마음이지만 겸손하기 위해 침묵을 지키기도 하는데 그런 방어벽을 한방에 무너뜨리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솔직함을 날 것으로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모든 게 감정적인 선에서는 상처를 입힐 수도 있으나 같은 맥락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주기도 하니까.


우린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만큼 우리가 누구인지 쉽게 얘기하지 않는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얼마나 답답했을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바쁜 현실에 치여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우리가, 맨정신으로는 입 밖으로 꺼내기 부담스러워 술에 취해 연신 소리 내는 우리가. 다행히 이런 자리들이 마련되어 조금이나마 감정의 응어리가 해소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런 시간들이 술과 함께하지 않고도 너무도 자연스러운 날들이 왔으면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생각을 억누르고 그것들을 피하려는 말들을 자꾸 뱉어내다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반복이 습관이 되어 체화되기 마련이다. 그럼 나중엔 내가 하는 말들이 전부 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말인 경우들도 생긴다.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나조차도 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걸 숨기려 하지 않고 조금은 더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혹 아직까지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있다면 용기를 가지고 내 곁을 지켜주는 누군가에게 터놔보자. 술이 없어도 괜찮다. 세상엔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들어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으니까. 솔직해도 괜찮다. 그게 우리 모습이니 말이다.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과 당신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있다면 하루빨리 허물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힘껏 뛰어가 당신의 솔직한 모습과 하나 될 수 있기를.




늦은 술자리를 정리하고 방에 들어와 곰곰이 오늘 하루를 돌이켜봤다. 지금까지 내 삶만을 주야장천 보다가 남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니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이 느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내가 먹고살 수 있을 만큼만 벌면서 행복한 일을 하는 게 진정한 성공이라는 사람이 있고 부자가 되어 모든 것을 자유롭게 누리며 사는 게 성공이라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지내다 보면 아마 두 부류의 사람들을 전부 만날 것 같고. 내가 원하는 삶은 진짜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꽤나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에도 여러 번 생각이 뒤바뀌는 걸 보니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인스타는 이제 내 생각까지 엿듣는지 삶에 관한 밥 말리의 영상을 보여줬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부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최고의 자산은 내 삶이고, 평생 그럴 것이다.” 내가 동경하는 삶의 모습이다. 진심으로 뱉어낸 저 말을 중심 삼아 살아가는 것. 말은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걸 깊이 공감하고 믿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존경스러웠다. 나는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삶 자체를 내 기준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었으면 하고 그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아직까지 방법을 잘 모르겠다. 마음은 매번 다른 이들의 삶을 들을 때마다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조금씩 모양을 바꾸어나간다. 나만의 가치관을 찾는 것, 더 열심히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도 많다.



인스타그램: @xyz_livelifeweir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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