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은주의 방(2018~2019)'을 본 후기
'은주의 방'은 내가 대학교에 다닐 무렵에 연재를 시작한 웹툰이다. 당시 나는 워낙 웹툰 덕후이기도 했고, 작가의 전작이었던 '세개의 시간'도 재밌게 봤던 터라 웹툰 '은주의 방'도 열심히 본방사수(본웹사수?)를 했었다. 그 뒤 몇년이 지나고 '은주의 방'이 드라마화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기분이 조금 묘했다. 요즘은 웹툰이 웹드라마, TV 드라마, 영화 등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흔하고, 이는 흥행에 있어 꽤 안전한 방법이기에 제작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이 아기자기한 웹툰이 드라마화 되었을 때 그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나만의 힐링 웹툰을 망치고 싶지 않았달까. 홍대병에 걸린 것만 같은 이런 생각도 조금 들었다. 그래서 응팔 이후 핫한 배우 류혜영이 '은주의 방'을 차기작으로 선택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도 무덤덤하게 지나간채, 그렇게 몇년이 흘렀다.
나는 어느새 직장인이 되었고, 다행히 사람들과 큰 교류없이 혼자 하는 일이 많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래도 크든 작든 간에 사회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를 조금씩 받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내향형인 나의 성향 상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에너지를 소비하다가 방전된 채 집에 돌아오면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있기 일쑤였다. 그 때 드라마 목록에서 발견한 '은주의 방'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몇년만에 힐링드의 느낌이 강하게 왔달까. 서로 죽고 죽이는 피곤한 장르 드라마에 지쳤던 내가(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아기자기한 방안에 누워 행복해하는 포스터에 홀딱 넘어가 버렸다.
그렇게 드라마 첫 화를 보고 씁쓸하게도 '직장인의 한(恨)'을 느꼈다. 학생일 때 봤던 웹툰 '은주의 방'과 직장인이 되어 본 드라마 '은주의 방'에 대한 공감의 깊이가 달라졌달까(물론 매체가 지닌 특성의 차이일수도). 아침 일찍 출근하고 돌아오면 기력이 없으니 방은 점점 더러워지고, 더러워진 방에 기분은 더 우울해지는 '은주'의 악순환이 남 얘기 같지가 않았다. 특히 자취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peer pressure(?)를 느낄 일도 없으니 미래의 내가 해결해주리라 믿고 집안일을 미루기 일쑤다. 사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생(대학생, 대학원생 모두 포함) 때보다 훨씬 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여가시간이 많아졌음에도 오히려 더 큰 악순환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 한편으론 놀랍기도 하다. 점점 더 공간에 지배당하고 있는 내 모습ㅎㅎ.
실제로 많은 사회과학 연구들은 어떤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 더 나아가 환경이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설명하는 '사회생태 모형'에 기반한 경우가 많다. 특히 행정/정책에 관한 연구가 그러한데, 해당 모형이 정부가 작동하는 방식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외부 환경 개선을 위해 예산을 쓰는 것은 정부가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시그널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바꾸는 것은 쉽지 않지만, 외부 환경을 바꾸는 것은 돈을 들인 만큼, 전문가를 붙인 만큼 눈에 띄게 결과가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드라마 '은주의 방'을 보면서 이런 연구들을 떠올린 이유는 이런 프레임워크 속에서 인간은 비교적 수동적인 존재로 비춰지는 반면, '은주의 방' 속 '은주'가 능동적으로 자신의 공간을 변화시키며 행복을 얻고, 또 주변 이웃들의 공간을 변화시켜주며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은주뿐 아니라 각 에피소드에 나오는 공간의 주인들이 모두 자신의 공간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 자체를 설레하고, 즐거워하는 듯이 보였는데, 이런 모습이 환경에 지배 당하지 않고 행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들 같았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패배의식에 젖어 조금의 변화도 거부하는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의 노력을 깎아 내리기만 하며 스스로는 전혀 노력하지 않는 모습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실제 역량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게 되면서 변화를 두려워할 때도 있다. 그러나 평생 자극과 변화 속에서 양적, 질적인 성장을 해나가는 것이 삶의 본래 목적은 아닐까?
글이 사뭇 진지해졌는데, 여담으로 '은주의 방'을 보면서 '김재영' 배우를 알게되어 무척 기쁘다. 그전까지 이 배우의 출연 작품을 본 적이 없어서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주 훌륭훌륭ㅎㅎ. 그리고 정주행 시기에 마침 보게된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에도 '김재영' 배우가 비중 있는 역할로 출연해서 우연치곤 좀 신기했다(처음엔 같은 사람인줄 모르고 나중에 알게 되었음. 약간 충격). '너를 닮은 사람'은 어쩌다 원작 작품의 시놉시스(?)를 보았는데, '김재영' 배우의 역할이 사건 전개에 중요한 부분인 만큼 앞으로의 연기가 기대된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캐릭터를 비슷한 시기에 보게 되어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