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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 백년松 그늘 아래 한 마음 먹으려니

백산심론(百山心論) 1강 9장 9산 소요산

by 여의강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나,


나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을 깎으려네.'

-원효, 몰부가



소요산 소나무 숲


소요산(587m)을 다녀왔습니다.


소요산(逍遙山),

경기도 동두천시와 포천시 신북면에 걸쳐 있으며

경기 소금강이라고도 불립니다.

서화담을 비롯 많은 시인묵객들이 소요(逍遙, 정한 곳이 없이 슬슬 거닐어 돌아다님)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지요.


산을 직접 올라보니, 아마 그 어른들은 들머리인 자재암 근처까지 만을 거닐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 여유로이 소요할 산세(山勢)가 아니었으니까요.


지금은 전철이 닿아 노인과 아이들이 즐겨 소요한다더군요.

아이와 노인은 자랑이 닮았다지요.


벌써(아직)

'이가 있다고, 걸을 수 있다고,

똥오줌 가린다고, 친구가 있다고,...'


노인은 아이였었고, 아이는 노인이 되는

돌고도는 인생사라 그러겠지요.



자재암 입석


소요산은 원효를 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조실부모하고 화랑으로 활약하다가 삶과 죽음의 허망함을 보고 불교에 귀의하였다는,

의상과 당나라 유학 가던 중 갈증이 나 맛나게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안 후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오도송(悟道頌) 외쳤다는,

저잣거리에서 몰부가(沒斧歌)를 불러 그 뜻을 알아차린 신라 태종 무열왕(김춘추)이 과부인 딸 요석공주를 연결해주어 신라 3현 중 하나인 설총을 낳았다는,

당시 베스트셀러인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서 등을 지어 중국 일본까지 이름을 떨쳤다는'


당대의 고승인 그 원효대사이지요.



자재암 입구


경주 떠나 천하를 주유하며 불교의 대중화에 매진하던 원효가 소요산에 자재암 지어 용맹정진 수도하였다지요.


원효를 만나지는 않은(혹은 못한) 채 먼발치에서 별궁 짓고 오로지 그의 높은 뜻 위해 어린 설총 데리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는 요석공주와의 로맨스가 서려 있는 산입니다.


중간중간 무슨 일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랑하는 연인을 바로 옆에 두고 만나지도 못하고 애틋하게 오고 갔을 두 사람의 애타는 마음이 보이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 돌보는 것보다 중생구제가 더 시급했을까라는 생각은 범인의 좁은 소견이겠지요.


등록된 970여 개 전통사찰 중 100개 이상이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다니 원효대사는 그만큼 시대를 초월한 우리 불교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온통 원효 이야기인 소요산의 경우는 기존 자료에 스토리 텔링과 브랜드 네이밍을 아는 어느 마케터의 풍부한 상상력이 조금 더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400년 전 일이니까요



원효대


세상을 관조할 나이,

관조는 못해도 소요는 해보자는 맘으로 출발했습니다.

일심, 일체유심조라는 대사의 오도송도 화두 삼아 곱씹어보기로 했고요.


용산역에서 0722 전철 탔습니다.


이른 아침 겨울의 역사(驛舍)는 매우 찼습니다.

한껏 웅크린 채 캐리어 끌고 힘들게 걸어가는 젊은 여인의 뒷모습이 애처로워 보입니다.

산객 몇을 제외하곤 전철 안도 한산하고 썰렁했습니다.



용산역 플랫폼과 빈 전철


0900 소요산역을 나왔습니다.


길 건너 먹거리 상점 가득한 골목 지나니 바로 공원 주차장과 산 입구가 보였습니다.

얼어붙은 계곡 끼고 아스팔트 길 한참 올라 매표소(2000원)에 닿습니다. 좋은 산 오르기 위해 몇천 원 내는 것이야 전혀 아깝지 않으나, 그 돈들이 어디에 쓰이는지가 명확지 않다는 것은 씁쓰름합니다.


요석공주 별궁 터, 원효폭포와 원효굴 지나 108계단 오르고 원효대와 금강문 통과하면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천년 사찰 자재암 나옵니다.


아담한 산사 한편으로 독립암 솟아있고 그 아래 청량폭포 얼어있습니다.



원효폭포, 원효굴, 청량폭포,독립암


원효와 관련된 사찰들은 계곡이나 약수 같은 물과 가까이 있다고 합니다.


나한전 바로 옆,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젖처럼 차가운 맛있는 물'이라 감탄할 정도로 찻물에 좋다는 원효샘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원효샘


소요는 여기까지였습니다.


자재암 안 쪽으로 하백운대 오르는 수직 계단 나타납니다.

소요산은 말발굽처럼 생겨 하중상 백운대와 나한대(571), 의상대(주봉 587), 공주봉(526)의 여섯 봉우리를 매우 거칠게 오르내려야 합니다.



자재암 옆 돌계단


경사도 60 이상은 돼 보이는 길을 하염없이 올라갑니다.


계단 끝나면 암릉길 이어지고 가끔 오붓한 흙길도 보입니다만 전체적으로 돌길이 많습니다.

확실히 높은 한 봉우리를 계속 오르는 것보다, 500m급이라 해도 여러 개를 오르내리는 것이 더 힘든 것 같습니다.

다 왔다 싶은데 내려가서 다시 시작이니까요.


낮은 구름 쉬어간다는 하백운대에서 잠시 숨 돌리고 중상 백운대 오릅니다.

오른쪽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인데 좁고 거친 길에는 마치 사람이 심은 것처럼 칼날 같은 편마암 바위들이 뾰족뾰족 솟아있습니다.


상백운대에서 의상대 오르는 길 이름마저 '칼바위'입니다.



계단길, 칼바위, 나한대와 의상봉


한 가지 위안은 길마다 까마득한 절벽 배경으로

바위 사이 뿌리내린 수수 백 년 멋진 소나무들입니다.


돌산이 육산이 될 때 '나무들이 돌에 뿌리를 내려 바위가 갈라지고 갈라진 바위가 비바람에 흙이 된다'더니 능히 그 과정이 짐작되는 풍경입니다.


온갖 모양 명품 소나무들이 걷는 길 내내 눈호강 시켜주었습니다.



바위에 뿌리박은 소나무


소나무소나무 쪽동백나무

소나무소나무 신갈나무

소나무소나무 굴참나무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 소나무


상백운대 내려와 나한대와 의상대 오르는 길은 다시 끝없는 계단입니다.


화두로 삼은 일체유심조가 코밑까지 올라옵니다.


'마음은 있으되 몸이 따르지 않는구나, 헥헥,...'


4개 봉우리 넘어 정상인 의상대 닿았습니다.


정상석도 하나 새로 들인 것 같습니다.

입구의 이전 정상석은 초라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방이 트이며 마차산이며 감악산과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까지 조망됩니다.


까마득한 아랫녁에는 광활한 동두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더군요.



정상풍경


잠시 인증 하고 마지막 봉우리 공주봉으로 향합니다.


원효의 이름은 산 초입에 두고, 동문수학한 의상이며 연인이었던 요석공주의 이름을 높은 두 봉우리에 둔 것도 겸손한 네이밍이 아닌가 생각되더군요.


공주봉은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있었고 시내를 내려보는 조망이 좋았습니다.


전쟁으로 화랑이던 남편 잃고 스님과 재혼하여 사고무친인 이 먼 곳까지 와 어린아이 손 잡고 살아갔을 요석공주의 삶을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공주봉 풍경


여기서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이정표에 소요산역까지 2km와 3.4km가 있길래 선뜻 짧은 쪽을 택했더니 길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스키장 최상급 코스처럼 똑바로 서 있으면 길이 등에 닿는 기분입니다.

낙엽 덮인 흙길이지만 거의 수직인 길을 잔뜩 허벅지 힘주며 한참 내렸습니다.


중간 기착지도 없이 곧바로 주차장으로 떨어지는 입구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내려온 것입니다.



급 내리막과 날머리


날머리 닿을 즈음 공연장 여가수의 유행가 곡조가 스피커 타고 울려 퍼지더군요.


'여어자아는 꼬옻이랍니다,

호온자 두우지 마아아세에요~'


노랫말에서, 불경되게도 꽃다운 요석공주 두고 용맹 정진하는 원효의 모습이 잠시 떠올랐습니다.


거리는 추워서 아이들은 없었지만 어르신들 몇이 삼삼오오 어울려 계셨습니다.


'입장료 천 원 안주 무한제공'이란 광고 문구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픈 호기심도 생겼지만, 어렵게 코로나를 살아가는 우리네 민초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 한 편이 짠해왔습니다.



주차장, 주막 광고문


가을의 빼어난 풍광은 벗은 상태였지만,

명품 소나무들의 늠름한 모습은 눈에 남았습니다.


백년송 그늘 아래

한 마음 얻으려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의 오도송 생각하며 걸었던 뜻깊은 산행이었습니다.



백 년 송


내가 먹어야 할

한 마음은 무엇일까?


나 한 마음먹는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따라오지 않는

이내 몸은 어찌하고?


님의 마음은 어떡하고?

남의 마음은 어떡하고?


내 맘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저 세상은 또 어쩌라고?


이런 생각에 이르자

원효대사의 껄껄대는 웃음소리

소요산 가득 퍼지는 듯합니다



소요산 소나무


*2022년 2월 20일 영하 7도의 추운 날이었지만, 바람은 약했고 산 능선에는 따듯한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소요산국민관광지~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봉~공주봉~주차장으로 6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약 8km 4시간 반의 혼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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